2024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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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7>교회의 길을 다시 묻는다

해방과 평화의 길, 교회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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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을 읽으며 예수님 삶을 성찰할 때마다 불편함을 피할 수 없다. 한 여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뱃속에 두고 무슨 배짱으로 그리 말씀하셨을까?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유년시절을 전한다.

 "주님께서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2-53).

 헤로데나 빌라도의 귀에 들어갔으면 즉시 `십자가형`에 처할 불순한 발언 아닌가. 목자들도, 시메온도, 한나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하나같이 힘없는 이들이었음에도 세상의 불의와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그 태도가 나를 부끄럽게 한다.
 
 #예수님의 꿈과 희망
 어머니 마리아처럼 예수님도 희년 곧 해방을 선포하는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며 젊음을 시작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

 그런데 마르코 복음은 이 예수님의 꿈과 희망이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버렸음을 생생하게 전한다. 짧은 마르코 복음을 대충 살펴보자. 처음부터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간주했다. 이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밥을 먹는다고 트집을 잡고, 안식일에 무슨 일을 하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으며, 헤로데 당원들과 없애버릴 모의를 꾸미며, 마귀 우두머리라고 소문을 내고,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따지고, 시험하려고 표징을 요구했다.

 예루살렘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올무를 씌워,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여 없앨 방법을 찾았으며, 마침내 유다의 도움(?)을 받아 그 뜻을 이루게 된다. 마르코 복음 전편에 걸쳐 일관되게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집요하게 예수님을 없애려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들이 단번에 뜻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바로 `군중`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땠을까? 수석사제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들을 두려워했을까? 안타깝게도 마르코 복음서는 그렇게 전하지 않는다. 제자들은 몸은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과 엇나갔다. 제자들은 믿음도 없었으며,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했으며,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탄`이라고 꾸지람을 듣기까지 했다. 배신하지 않겠다고 힘주어 장담했던 제자들은 막상 예수님께서 붙잡히자 모두 달아났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자신이 한패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했으며,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제 발로 수석사제들을 찾아갔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조차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아 그분께 꾸지람을 듣는다.
 
 #인간은 교회의 길이다
 힘깨나 쓰는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대들고, 곁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중의 폭력인 셈이다. 예수님은 무방비로 폭력 앞에 노출됐다. 다만 무명의 불쌍한 군중만이 예수님을 지켜주었던 형국이다. 그럴 만도 했다. 그분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가지셨다. 그 이유가 바로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었다.

 세상 누가 그 군중을 온몸과 마음으로 끌어안았던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원로들과 헤로데 같은 지도자들은 더 이상 군중의 참된 지도자가 아니었다. 로마에 부역하며 일신의 영달을 탐했던 이들, 곧 하느님의 포도밭을 가로채려는 이들에 불과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감탄하며 따른 이유가 있었다. 자신들과 한편이 되어 같이 고통을 겪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서 불의와 폭력을 고발하는 목소리를 들었으며, 해방과 평화의 길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방과 평화를 갈망하던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지켜줄 힘이 없었다. 현실의 폭력은 그렇게 해방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짓밟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헌장」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른다.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의 궁핍을 덜어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8항).

 2000년이 지난 오늘에도, 공의회를 연지 50년이 지난 오늘에도, 거악은 세상 곳곳에 스며들어 온 인류를 신음케 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무절제한 방종이든, 금융자본의 무한 탐욕과 횡포든, 정치권력의 현세적 야욕이든, 현실의 불의와 폭력 앞에서 인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힘없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은 고통을 받으며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교회의 길을 다시 성찰한다. "인간은 교회의 길이다"(「백주년」 제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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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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