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8>교회의 사회교리-선포의 임무, 고발의 임무

굶주린 이들 위한 목소리 어디에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2-53).

 성경의 `마리아의 노래` 한 구절임을 모르는 교우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구절을 거룩한 성전에서 성경 말씀으로 듣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만일 이 구절의 출처를 지운 채 각 성당 정문에 펼침막으로 만들어 길거리 오가는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걸어놓았다고 상상해 보자. 아마 시끄럽지 않은 성당이 없을 것이다. 길거리 오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교우들 사이에서도 소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외면 받는 마리아의 노래
 오늘날 통치자는 누구며 비천한 이들은 누굴까? 오늘날 굶주린 이들은 누구이며, 부유한 자들은 또 누굴까? 성경에 익숙한 누군가는 이 구절에서 애써 이른바 `영적인 미`를 찾으려 할 것이다. 통치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세속의 힘에만 의지하는 이들이며, 비천한 이들은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이들이며, 굶주린 이들은 하느님 말씀을 갈망하는 이들이며, 부유한 자들은 세속의 것에 탐닉하는 이들이라고…. 그러나 이 구절이 성경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영적인 미를 찾으려 할 것인가.

 아마 왜 거룩한 성당에서 `끌어내리느니`, `내치느니`하는 미움과 증오의 언어를 담은 문구를 내거느냐고 꾸짖으려 할 것이다. 아마 통치자와 비천한 이들 사이를,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 사이를 분열시키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냐
고 야단칠 것이다. 교회는 사랑과 자비, 용서와 관용, 일치와 화합을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가르치려 들 것이다. 길거리에서 이 구절을 본 사람이나 매일 성당을 드나드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 구절이 성경 말씀, 그것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한 말이라고 한다면 그 반응은 어떨까?
 우리는 불편함에 불편해한다. 그래서 외면하거나 아예 마음과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한다. 그렇게 불편해하고, 그래서 외면하고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이 참 많다. 마리아의 노래도 그 가운데 하나다. 마리아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보통의 젊은 여인에 불과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보통 이하의 비천한 여인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만삭의 몸인데도 여인숙 방 한 칸 구하지 못했을까?

 비록 천주의 모친이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하찮은 한 여인이 통치자를 왕좌에서 끌어내린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당대 아우구스티노 황제나 총독 빌라도나 로마에 부역하고 있던 영주 헤로데와 수석사제와 원로들 귀에 마리아의 발언이 흘러들어갔다면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실을 외면하면 미래도 없다
 마리아의 노래의 이 구절은 영적 의미를 갖는 고차원의 수사(修辭)가 아니었다. 실제 당대 군중이 갖고 있던 간절한 염원이었다. 로마제국 식민통치, 그에 부역해 한 몫 챙긴 꼭두각시 왕과 그 충복들은 군중의 고혈(膏血)로 자주색 옷과 고운 아포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살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군중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누워(…)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비천하고 굶주린 군중은 실제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초주검이 되어 길거리에 내버려졌다"(루카 11,30 참조).


 마리아의 노래는 현실에 도전한다. 군중을 고통에 내몰고 왕좌를 차지한 이들과 그 고통을 외면한 부유한 자들을 고발하고 꾸짖는 것이다. 그것도 실속 없는 원한이나 미움이나 질투의 감정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 `구원자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이다.

 오늘날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이웃이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라는가? 오늘날 하느님이 사랑하는 동물과 식물, 강과 바다, 산과 하늘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신음하는가.

 그런데도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애써 외면하고 눈을 감고 귀를 막으려 한다. 외면하니 편하고, 눈을 감으니 꿈을 꿀 수 있고, 귀를 막으니 천상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좋은가? 한참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황폐한 세상이 펼쳐져 있고, 눈을 뜨니 내 자식의 종기 핥는 모습이 보이고, 귀를 여니 내 부모의 신음이 들리지만, 주변에 아무도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줄`(루카 16,24) 사람이 없다. 제발 그런 일이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교회의 사회교리에는 선포의 임무와 더불어 고발의 임무도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81항).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2-10-07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7

필리 2장 3절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