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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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40> 사제와 레위인은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부자의 삶만이 축복이라 여기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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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말했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루카 12,16-18).
 
 #심화하는 사회 불균형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른바 경제개발, 성장, 경쟁 따위가 마치 불변의 상식처럼 된 사회에 살고 있다. 나눔과 분배, 배려, 공존 따위의 삶의 태도는 공허한 말 잔칫상에 오를 뿐이다. 사실 그렇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치른 후부터니까 불과 60년 남짓 되었다.

 이른바 `고도 압축성장`으로 설명하는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현실뿐만 아니라 의식과 가치마저 고도 압축시켜버렸다. 보존과 개발, 나눔과 성장, 배려와 경쟁을 대립시켜 취사선택하도록 강요받았다. 그 대가는 오늘 우리가 겪는 심각한 불균형이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 이 심각한 불균형을 대물림해야 할지 모른다. 심각한 불균형은 아무리 똑바로 가려 해도 왜곡(歪曲)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지름이 다른 두 바퀴의 이륜마차를 올라타고 질주하는 형국이다.

 이 심각한 불균형 현상 가운데 가장 도드라진 것이 `부의 불균형` 아닐까?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의 모든 것을 경제성장에 쏟아 부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죽을 듯이 몰아세웠고, 따르지 않으면 핍박하고, 이의를 제기하면 제거했다. 그것은 일종의 강요였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시작으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을 거쳐, 세계 경제대국 10위에 도달했다. 자랑스러워할 법하다.

 그러는 사이 정의와 민주, 연대, 배려, 공존과 같은 가치와 의식은 서서히 죽어갔다. 인간다운 생활을 꿈꾸는 것은 불순한 사상으로 매도됐으며, 인간다운 사회건설을 희망하는 것은 사치로 비난받기 십상이었다. 그 현상을 알았으면서도 참았을지 모른다. 나태함으로 무사유(無思惟)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침내 자살률 세계 1위, 저출산율 세계 1위, 그리고 상상초월의 빈부격차와 가난과 부의 대물림 앞에서 수많은 시민이 절망하고 있다.
 
 #복음을 기초로 한 경제 민주화
 축적되면 나눌 줄 알았다. 쌓이면 흘러넘쳐 골고루 퍼질 줄 알았다. 하지만 분배도 낙수효과도 없었다. 그것은 속임수였으며 착각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는 그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아니, 그 착각에서 깨어나기가 두려워 바퀴 크기가 다른 이륜마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지도 모른다. 두려움에서뿐만 아니라,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뛰어내리지 못하고 있다면 섬뜩하다.

 그러는 사이, 우리를 앞으로 내모는 이들은 `곳간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재물을 모아` 둘 궁리를 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들도 이렇게 시민을 왜곡의 노선으로 내몰다가는 `더 큰 곳간들`을 지을 수 없다는 위기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경제 민주화가 화두가 된 참 배경이 사람을 위한 경제 민주가 아니라, 더 크게 확장할 정교한 탐욕의 곳간을 마련하는 또 다른 거짓 이데올로기는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곳간은 사람을 도구로 전락시킨 시장, 무절제한 신자유주의 경제와 자본의 세계화 따위일 것이다.

 얼마나 더 성장이니 경제 민주화, 복지라는 달콤한 언어로 포장한 심각한 불균형 속에서 고통을 겪어야 할지 가늠하는 것조차 두렵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 그 고통스러운 호소를 낙오자의 불만쯤으로 치부하거나, 고통의 원인을 개인의 도덕적 해이로 점잖게 꾸짖는 지식사회의 태연함이다. 또 빈곤을 숙명이나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이고, 더 나아가 현실을 초월하도록 교묘하게 인도하는 종교의 무책임이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의 시대를 향해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이 땅의 지식사회와 종교는 부자에게 라자로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호화로움의 일부는 나누는 것이 정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자의 삶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며 라자로를 외면한다. 강도들을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린"(루카 10,29-31 참조) 사제와 레위인처럼 말이다.

 "신앙인들이(…) 종교, 윤리, 사회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어 하느님과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버린다면, 신앙인들은 이 무신론 발생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19항).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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