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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47> 어리석어서 거룩한 그리스도의 미사(크리스마스)

사회적 약자에게 다가온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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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흘리개 시절, 이색 저색 크레파스로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는 뜻도 모르는 문구를 집어넣어 성탄 카드를 만들곤 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지금 뜬금없이 `왜 그렇게 무성의하게 카드를 만들었을까` 자문한다.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딱히 카드를 건넬 이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 애써 핑계를 찾는다. 수십 년이 지나 해마다 성대하게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교회의 일꾼으로 일하고 있다.
 
 #그리스도 미사의 진정한 의미

 필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철없던 그때나 지금이나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한 이유는 `거룩하게 태어난 그 아기가 도대체 무슨 죄를 범했기에 십자가에 처형되었을까`,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으니, 그 아기는 하늘과 땅을 하나로 잇는 길을 연 셈인데, 사람들은 왜 십자가를 만들어 하늘로 높이 세워놓고 그곳에 그를 매달았을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또한, 하늘과 땅을 잇는 길을 폐쇄하려는 것이었을까, 왜 폐쇄하려 했을까, 하느님 통치를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까, 자신들의 무한 통치를 빼앗기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혹시 이 사람처럼 하늘과 땅을 이으려는 불경한 짓(?)을 하면 이 꼴을 당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누군가 으름장을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상념들 때문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 성탄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말이다. 그리스도(Christ, 기독, 基督)는 하느님의 사명(구원과 해방)을 받아 기름을 얹어 성별(聖別)하여 파견된 이(메시아)를 말한다. 미사라는 말은 `파견`이라는 의미를 갖는 라틴말이지만, 교회는 희생과 나눔과 친교의 제사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하느님 사명을 요약하면 구원과 해방이다. 이는 비(非) 구원과 억압의 상태를 전제한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비 구원과 억압의 상태에 놓인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고 해방하기 위해 파견된(성탄) 예수의 희생(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것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원과 해방이 마음의 문제이며 개인의 문제이며 사후의 문제이기만 한 것인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많은 사람의 기대와는 달리 신구약성경과 교회 가르침은 구원과 해방이 현실의 구체적 문제이며, 공동체의 문제이며, 역사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예수가 관심과 애정을 갖고 돌본 이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는지, 거꾸로 끈질기게 예수를 죽이려 애쓰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는지를 보라. 오늘날 표현으로 요약하면 예수는 사회적 약자에게 구원과 해방의 길을 열어주었고, 그 예수를 죽음의 길로 내몬 이들은 현세의 힘 있는 지도자들이었다.
 
 #따뜻함을 전하는 그리스도인

 우리는 예수의 성탄을 노래하고, 카드와 선물을 주고받으며, 거리를 빛으로 장식하지만, 그 모든 것은 반드시 이 땅의 평범한 사람에게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이어야 한다. 예수가 목숨을 바쳐 돌보고 섬긴 사람들, 예수가 당신의 이웃으로 또 벗으로 삼은 이들을 외면하면 안 된다. 그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부르는 성탄 노래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대한 조롱에 불과하다. 거리에 내몰린 이들을 그늘로 몰아넣었다면, 아무리 화려한 성탄 장식도 의미가 없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겉옷을 놓고 벌인 제비뽑기에 불과하다. 수많은 이들을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틀에 가둬놓았다면, 성탄 카드와 아무리 비싼 선물이라도 고통에 신음하며 목말라 하는 예수에게 건넨 신포도주에 불과하다.

 존경하는 어느 신부가 지난해 12월 20일 "아직 성탄도 아닌데 성금요일 아침을 맞은 텅 빈 마음"이라는 문자 글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그리고 다음날 21일 한진중공업지회 최강서 조직차장의 죽음에 이어, 또 그 다음날 22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이운남씨가 목숨을 끊었다. 우리 사회가 `잘 살아보세`를 노래할 때, 예수처럼 수많은 힘없는 이들이 사선을 넘나들고 있다.

 성탄을 보내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와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땀을 흘려야겠다. 내 삶이 크리스마스 카드가 되어야겠다. 겨울 추위를 이기려면 따뜻함이 필요하고, 마땅히 땔감을 태워야 한다. 이웃과 세상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남을 태워서라도 나를 따뜻하게 하면 된다는 세태에서, 나를 태워 남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참 거룩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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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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