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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현 신부의 생태영성으로 보는 샬롬과 살림의 성경읽기] (1)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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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이번 호부터 정의와 평화, 생명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는 ‘생태영성으로 보는 샬롬과 살림의 성경읽기’ 를 연재한다. 송창현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가 집필하는 이 칼럼은 성경 안에서 평화와 살림, 즉 생명을 살리는 주제들을 생태 신학적 시각으로 다뤄보는 난이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이것은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시작하시면서 말씀하신 행복선언의 한 구절이다. 예수님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신 ‘평화를 이루는 사람’(peacemaker)은 누구일까? 그분이 말씀하신 평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신약성경에서 드러난 ‘평화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한다.

구약성경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샬롬’이다. 샬롬은 다른 사람과 잘 화합하는 삶을 가리킬 뿐 아니라 한 개인이나 사회의 ‘완전함’ ‘건강’ ‘안녕’ ‘물질적이고 영적인 번영과 풍요로움’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샬롬’이라고 인사한다. 샬롬은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조화로운 상태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평화는 기쁜 소식의 내용이고 하느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구원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이사 52,7) 따라서 평화는 상황에 따라 입기도 하고 벗기도 하는 외투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뒤따르는 사람의 필수적이고 무조건적인 과제이다.

일상생활에서 평화는 그저 위험을 피하고 시끄러운 것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웃고 점잖고 친절한 것이 평화가 아니다. 예수님은 그런 평화를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그저 점잖게 살아가기 위한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러 오시지는 않았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칼로 표현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실 다툼을 낳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동일한 단어를 칠십인 역 성경의 잠언 10장10절에서 발견한다. “솔직하게 나무라는 이는 평화를 가져온다.” 잠언의 이 말씀에서 ‘평화를 이루기’는 단지 현 상황(status quo)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지럽히는 것에 더 가깝다. 사실 역사의 예수님은 위험을 피하고 소란을 회피하신 분이 아니었다. 그분은 잠언 10장10절에서 가르치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의 본보기이시다. 마태 23장에서 예수님은 당시 유다인 지도자들을 꾸짖으시며, ‘독사의 자식들’ ‘위선자들’ ‘눈먼 인도자들’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마태 12,19-21에 따르면,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거리에서 다투지도 소리치지도 않으시는 얌전한 분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는가? 사실 마태오의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라는 구절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돌봄(care)을 표현한다. 가난한 이들은 힘든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음식과 자원이 부족하여 고통당하는 이들이다. 예수님은 특별히 ‘치유’ ‘구마’ ‘대안적 공동체의 형성’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과의 ‘함께 아파하기’(compassion)를 실천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친절하고 자비로운 분이셨다. 이와 같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 되기’의 핵심은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과 빼앗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고, 너무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나무라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 되기’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용기 있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평화를 이루기’는 사회적 차원에서 땅, 음식, 물, 피난처를 빼앗긴 사람들을 돌보는 행동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써, 가난하고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돌보고 모든 피조물의 고통스런 외침에 주목하는 것이다.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취득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창현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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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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