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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이야기]<4> 헤로데의 아들들

''구관이 명관?'' 아버지보다 더한 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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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로데와 그의 아들들은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해 사치스런 호화생활을 누렸다.
사진은 예리코 헤로데 궁전에서 발굴된 대리석 수반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헤로데에게 선물한 것이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로마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제15년, 즉 서기 29년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요한 세례자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하면서 세례를 베풀었다. 복음서는 요한 세례자가 활동할 때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안티파스)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있었다(루카 3,1)고 한다.

 이 시기 팔레스티나의 정치 상황은 헤로데 임금 시대와는 많이 달랐다. 헤로데 후계자 가운데 홀로 왕국을 유지할 만한 특출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가족 간의 협력으로 그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헤로데의 아들과 그의 누이에게 유다 땅을 4쪽으로 나눠 다스리게 했다.  

 그래서 헤로데의 네 번째 부인인 사마리아 여인 말타케의 아들 헤로데 아르켈라오스가 왕국의 중앙 부분인 이두매아와 유다와 사마리아를,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난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요르단 건너편 페레아 지역을 분할받았다. 또 이집트 여인 클레오파트라에게서 태어난 헤로데 필리포스가 갈릴래아 호수 건너 골란과 성경에서 바샨이라 불리는 바타네아 산악 지대와 북부 트랜스 요르단 일대를, 헤로데의 누이 살로메는 아스돗과 얌니아오 아스칼론 등 해안 도시를 상속받았다.
 
 헤로데 아르켈라오스(기원전 23~서기 18년)

 헤로데 아르켈라오스는 기원전 4년 아버지 헤로데의 장례를 마친 후 예루살렘에 운집한 군중에게 "왕의 칭호를 받기 위해 로마로 갈 것"이라고 밝히고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어떤 이들은 세금 면제를, 또 다른 이는 헤로데 측근의 처벌을 요구했다. 아르켈라오스가 이 모든 요구를 거절하자 폭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시리아 총독 바루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바루스는 로마군을 이끌고 와 폭동을 진압하고 유다인 2000명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헤로데 아르켈라오스는 예리코에 있는 헤로데 궁전을 호화롭게 재건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를 건설하려고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다. 그러자 유다인의 폭동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노는 서기 6년 그를 면직시켜 오늘날 오스트리아 빈으로 추방하고, 그의 영토를 로마 속주로 귀속시켰다.

 마태오 복음은 헤로데 임금의 유아 살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던 요셉이 아기 예수와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으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해"(마태 2,21-23)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가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자렛 사람`이라 불리게 됐다고 마태오 복음은 전하고 있다.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20~서기 39년)

 헤로데 안티파스가 상속받은 갈릴래아와 페레아 지역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함락된 이후 이방인이 대거 이주해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라 불렸다. 유다 하스모네아 왕조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기원전 104년에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주거민을 강제로 할례를 시키고 유다인을 이주시켜 철저하게 율법을 따르는 경건한 지역으로 뿌리내리게 했다.

 그는 형이 실권하자 자신도 권력을 잃을까 봐 갈릴래아 호수에 새 수도를 건설해 당시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 `티베리아스`라고 불렀다. 아울러 페레아 베타람타를 재건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아내 이름을 붙여 `리비아스`라고 했다. 또 예루살렘을 자주 방문하고 대사제 선정에도 관여하지 않는 등 신중하게 유다인의 눈치도 봤다.

 그러나 그는 서기 28년 이복형인 헤로데 필리포스의 아내이자 조카인 헤로디아에게 매료돼 아내인 나바테아의 공주와 이혼하고 헤로디아와 재혼함으로써 여지껏 쌓아온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요한 세례자는 안티파스의 불륜을 공공연히 힐난하다 암만의 마케루스 요새에 투옥됐고, 그 유명한 연회 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요구로 참수됐다(마르 6,17-29; 마태 14,3-12; 루카 3,19-20). 이 사건이 빌미가 돼 로마의 눈 밖에 난 그는 칼리굴라 황제의 명으로 면직돼 지금의 프랑스 리옹으로 유배됐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복음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만나 보려 하는 장면`(루카 9,7-9; 마태 14,1-2; 마르 6,14-16),`예수님께서 그를 여우라고 단정짓는 내용`(루카 13,31-32), `빌라도 총독과 함께 예수님을 심문하는 대목`(루카 23, 6-12)에 등장하고 있다.
 
 헤로데 필리포스(기원전 27~서기 33/34년)

 아르켈라오스와 안티파스의 이복형제인 헤로데 필리포스는 갈릴래아 북부 산악 지역을 다스렸기에 팔레스티나의 정치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현명하고 온순한 성품을 가진 그는 예술, 문학, 과학, 지리학에 조예가 깊어 요르단 강의 수원지를 밝혀내기도 했다. 그는 기원전 4년부터 서기 33/34년까지 자신의 영지를 통치했다.

 그는 안티파스와 마찬가지로 친로마 정책을 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딸 율리아를 기념해 갈릴래아 벳사이다 근처에 도시를 건설해 `율리아스`라 불렀다. 또 복음서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마태 16,13-20; 마르 8,27-30; 루카 9,18-21)한 장소인 카이사리아 필리피도 그가 기원전 2년께 헤르몬 산 밑에 샘이 솟아오르는 곳에 세운 도시이다.
 그가 죽자 그의 영지는 시리아에 합병됐다가 칼리굴라 황제가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에게 줬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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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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