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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부활하신 아침, 숯불에 물고기를 구우셨다

[엉클죠의 바티칸산책] (18)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최초의 조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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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성 베드로 수위권 성당 제대 앞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빵과 물고기로 아침 식사를 했다고 전해지는 바위가 있다. 라틴어 멘사 크리스티(Mensa Christi)는 ‘그리스도의 식탁’이란 뜻이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요한 복음의 이 대목을 묵상할 때면 온몸을 전율케 하는 기쁨이 솟아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시는 모습, 저는 이 장면이 성경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평화로우며 가장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갈릴래아 ‘관상 순례’는 항상 이곳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만찬에서 조찬까지

예수님과 제자들만의 식사 장면은 성경에 두 번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수난당하기 직전 열두 제자와 함께 파스카 음식을 드신 ‘최후의 만찬’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하신 직후 일곱 제자와 아침을 드신 ‘최초의 조찬’입니다.

만찬에서 조찬까지 짧은 기간에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벌어졌지요. 유다는 스승을 팔아먹고, 베드로는 스승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며, 제자들은 죄다 도망갔습니다. 열두 제자들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수난당하고 홀로 돌아가셨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끈끈했던 관계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최후의 만찬, 제자들의 배신, 스승의 죽음과 부활, 최초의 조찬!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추구했던 모든 가치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두 식사의 성격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예수님은 만찬과 조찬으로 시대를 구분하셨습니다. 만찬이 부활 사건 전의 낡은 시대를 청산하는 행사라면, 조찬은 부활 사건 후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행사였습니다. 만찬은 예루살렘 도성 이층 다락방에서, 조찬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있었습니다. 다락방은 사람이 만든 닫힌 공간이고, 호숫가는 하느님이 창조한 열린 공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일곱 제자를 위해 손수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숯불에 구운 물고기와 빵! 군침이 돕니다. 새벽 고기잡이를 마치고 뭍에 올라온 제자들은 무척 시장했겠지요. 고기 굽는 냄새는 그들의 식욕을 한껏 돋웠습니다. 예수님은 요리도 잘하셨던 것 같습니다. 해본 사람은 잘 압니다. 숯불에 물고기 굽는 게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날 아침 무려 팔인 분(예수님 포함)의 물고기를 굽습니다. 요즘처럼 취사시설이 좋은 시대에도 어지간히 숙달된 요리사가 아니면 어려운 일입니다. 무쇠도 녹일 나이의 장정 일곱 명이었으니 음식도 많이 필요했겠지요. 미리 준비한 고기가 부족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당신이 기적을 일으켜 잡아 온 싱싱한 물고기를 먹이고 싶었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요한 21,10) 얼마나 정겨운 모습입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무척 민망하고 창피했을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 자기들이 헌신짝처럼 버렸던 스승이신데 직접 찾아와 아침밥을 이렇게 차려주시니 말입니다.



회개와 용서의 자리

사실 예루살렘 만찬 분위기는 동상이몽이었지요. 예수님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수난과 부활을 이야기하셨지만, 제자들을 딴전을 피웠습니다. 스승을 팔아먹을 궁리를 하는가 하면, 스승이 권력이라도 차지할 줄 알고 미리 자리다툼을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영적으로 불일치 상태에 있었지요. 갈릴래아의 조찬 분위기는 이심전심의 회개와 용서의 자리였습니다. 배신자 패륜아 불효자, 이런 비난을 받았어야 할 처지였는데 예수님께서 손수 고기를 맛있게 구워주셨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했겠습니까. 제자들은 깊이 반성했고, 예수님은 모든 허물을 받아줬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영적으로 일치를 이룬 회개와 용서의 식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말씀을 남기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무엇을 이루셨다는 말씀인가? ‘최초의 조찬’이야말로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실체의 한 자락, 천국의 한 모습이 아닐까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화가들은 저마다 신학적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최후의 만찬’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불후 명작 ‘최후의 만찬’은 그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과문한 탓이긴 하지만 ‘최초의 조찬’을 그린 화가는 많지 않습니다. 그 많은 화가가 왜 그랬을까, 궁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왜 이 장면을 놓쳤을까. 긴장감이 감도는 ‘최후의 만찬’을 그렸으면,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최초의 조찬’도 그렸어야지!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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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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