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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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규 수녀의 사랑의 발걸음] 12. 크고 작은 것이 그리 중요한가?

프랑스 성요한 사도 수녀회 장현규(마리스텔라)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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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초의 일이다. 당시 독감으로 한 주 동안 환자들을 방문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다음 주 수요일 환자를 방문하는 날이 되어서는 아침부터 눈이 쉼 없이 내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날씨였다.

베르사유의 수녀원 앞에는 넓은 언덕 위로 수많은 나무가 숲을 이룬 큰 공원이 있다. 나뭇가지마다 은빛 눈이 떨어질 듯 말듯 가느다랗게 쌓여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숲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마치 이곳이 ‘백설의 나라’로 바뀌어버린 듯 착각마저 들었다. 베르사유 시민들과 우리 수녀들에게 안겨주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그러나 찻길과 인도는 걸어 다니기가 위험스러울 정도였다. 베르사유에서 오베흐빌리에까지 먼 거리를 그래도 가야 하는 건가. 환자들을 위해선 가야 하는데…. 망설이던 끝에 자매 수녀들에게 물으니, 즉시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답한다.

지난주에도 못 갔고, 이번 주에 또 못 가게 된다는 것이 몹시 안타깝기만 했고, 병상에서 힘들어하는 환자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환자들을 만나온, 나의 수도생활의 큰 부분이 된 환자들과의 만남이 2주 넘게 단절돼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다 이틀 후인 금요일이 됐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도 더는 오지 않고, 조금 흐리긴 했지만, 밖을 나가기 충분했다. 길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1시간이 넘는 ‘전철 여행’ 끝에 병원에 도착하니 피로가 좀 몰려오는 듯했다. 그런데 환자 한 명 한 명을 만나고 나면 신기하게도 피로가 확 사라짐을 매번 느낀다. 주님이 주시는 기분 좋은 오묘함이다. 특히 병실로 들어가는 나를 환한 미소로 반기며 기뻐하는 그들의 선한 모습이 나의 피로를 바람처럼 날아가게 해준다. 만남을 통해 좋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환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결코 아닌 것이다. 주님 안에 서로의 만남이 마냥 좋고, 반가운 일이다.

그래서였나. 나는 이날 30여 명의 환자를 만났다. 보통 때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인이 각각 1명이었고, 그 외에는 모두 무슬림들이었다. 그중 여든이 넘어 보이는 한 할머니는 불어를 잘 못하는 알제리인이었다. 할머니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계속 하신다. 그러나 기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순수하기만 하다. 실제 말뜻을 알아듣기 어려운데도 할머니와 나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할머니가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귤들을 가리킨다. 내게 주고 싶어 하는 눈치다. 나는 오후 늦은 시간에는 귤을 먹지 않지만, 할머니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받아들여 하나를 집어서 보이니 할머니의 표정이 이내 흡족해졌다.

무슬림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또는 종교가 없는 이들이라 해도 대화는 우리의 관계를 막지 못한다. 아니, 더욱 풍요롭게 한다. 작은 사과 하나라도 건네고 싶어하는 그 마음 안에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이에서 정이 생긴다. 그 정으로 나도 귤 하나, 동전 한 닢을 기꺼이 받곤 한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이고, 그 안에 담긴 사랑이며, 그 사랑은 곧 내 마음 안에 흡수된다.

크고 작은 것이 그리 중요한가. 무엇이든 줄 수 있는 게 없다 해도 따뜻한 웃음 하나라도 건넨다면, 그것이 환자와 나 사이의 큰 나눔이 아닌가. 성경 말씀은 오늘도 내게 꼭 맞는 가르침을 준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으니,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1베드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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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7-22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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