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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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에 내 믿음의 현주소는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7. 감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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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시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적극 노출시키 데에 익숙해 있다. 자신이 가진 진정한 믿음, 자신이 만들어가는 삶은 무엇인지 돌아볼 시간도 필요하다. 출처=pixabay



노후가 불안한 M은 최근 베이비시터(babysitter)로 일을 시작했다. 아기를 돌보는 일은 기쁘지만, 아기의 부모와의 관계가 생각보다 만만찮다고 한다.

얼마 전에 아이가 잠투정을 하는데 수면교육 차원에 스스로 잠들게 하려고 잠시 지켜봤다고 한다. 그런데 별안간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더란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M은 놀라 주위를 살피니 CCTV에서 아기 아빠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실에만 있는 줄 알았던 CCTV가 방에까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인간적으로 모욕감을 느꼈고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졌다고 한다. M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간 1936년에 나온 영화 ‘모던타임즈’의 한 장면이 겹쳐서 잠깐 소름이 돋았다. 노동자인 찰리 채플린이 화장실에 가서 몰래 휴식을 취하며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데 감시카메라를 통해 기업주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찰리는 깜짝 놀라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사라지는 장면이다. ‘모던타임즈’는 자본주의의 인간성 말살을 풍자한 블랙 코미디영화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베이비시터들이 감시 대상이 되었을까? 감시한다는 것은 ‘의심’을 전제로 한다. 이런저런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해 베이비시터를 의심하는 부모들이 늘었고 CCTV를 설치하는 사례도 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CCTV를 현대판 원형감옥이라고 한다. 18세기 철학자 제레미 벤담은 죄수를 교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본다’는 뜻을 가진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원형 감옥을 고안했다. 감시 공간을 어둡게 하여 죄수들이 감시자를 확인할 수 없지만, 항상 감시당하는 압력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

철학자 한병철의 책 「투명사회」에서 현대인들은 자기를 적극적으로 전시하고 노출하면서 ‘파놉티콘의 건설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노출증과 관음증이 디지털 파놉티콘을 살찌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능동적으로 감옥을 만들어놓고 스스로 그 안에 갇힌 죄수가 돼버린 셈이다.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투명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투명’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를 노출시키는 긍정적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투명’은 감시하는 새로운 통제고 우리는 통제하도록 스스로를 노출하고 드러낸다.

어디든지 계시고 무엇이든 다 알고 계시며 저를 살펴보시는 분, 앉거나 서거나 걸어도 누워도 내 모든 것을 아시는 분, 하늘로 올라가도 저승에 가도 거기 또한 계시는 분(시편 139,1-2.8)이 바로 우리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지 오로지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런데 디지털 신들(gods)이 나타나 떠들어댄다. 어디를 가든 24시간 나를 지켜보고 나에 대하여 무엇이든 다 안다고 외친다. 세금은 냈는지, 부동산은 얼마나 있는지, 누구와 전화나 문자를 어떤 내용으로 주고받는지, 어떤 책과 옷을 좋아하는지,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어디가 아파서 어떤 병원을 방문했는지도 다 안단다. 스마트폰 위성 위치확인시스템(GPS) 설정에 동의만 하면 나의 실시간 동선이 그대로 노출되어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 활동은 디지털 발자국으로 남아,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원하지 않는 것까지 고스란히 나의 역사로 남는다.

하느님이 부르셨고 또 내가 원해서 하느님을 믿는다. 내 의지로 수녀원에 들어와 주어진 규율대로 산다. 그리고 그 틀에서도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행복하다. 그런데 여기에 뒤질세라 디지털 신도 외친다. 디지털 시민들도 스스로 선택해서 감시당하고 있고, 그 안에서 자유롭다고 믿고 있다고 말이다.

오늘도 우리는 하느님과 디지털 신들 사이를 오가며 산다. 어느새 부적이 되어버린 스마트폰을 끼고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리고 묻는다. 나의 믿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나의 믿음은 정말 괜찮은지?





영성이 묻는 안부

보아야 믿나요? 그래야 믿을 수 있고요? 우린 모든 것을 증명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그렇지 못하면 거짓이 되는 상황에 익숙하고요. 디지털 기계는 ‘예’ 혹은 ‘아니오’ 밖에 모릅니다. ‘예’인 듯 ‘아닌’듯 하는 식의 접근은 불가합니다. 켜짐과 꺼짐, 좋음과 나쁨, 백색과 흑색 등 이분법으로 표현돼요. 하지만 아날로그는 때론 희미하고 보일 듯 말듯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듯 혼란스러워 증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도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그 어떤 지점 아니던가요? 죽도록 열심히 사랑하고 믿어도 ‘예’ ‘아니오’로 답할 수 없는 알파고도 알 수 없는 그런 지점인데요. 바로 거기에 우리 하느님이 계십니다. 투명하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믿기에 아름다운 우리의 신앙이지요.



김용은 수녀 (살레시오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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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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