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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성인] 성 비오 10세 교황 (8월 21일)

교황, 교회법 개정, 성체 신심, 1835~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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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7대 성 비오 10세 교황은 20세기 교황들 가운데 본당 사목 경험이 가장 풍부한 교황이었습니다.

1835년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 지방에서 태어난 성인은 1850년 파도바의 신학교에 입학, 1858년 사제품을 받고 17년 동안 본당 사제로 활동했습니다. 본래 이름은 주세페 사르토. 파도바교구의 작은 도시 톰볼로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한 그는 본당 교우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야학을 열어 글을 가르칠 정도로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함께했습니다. 어린이들을 유난히도 좋아했던 그의 주머니엔 항상 사탕이 가득했고, 거리의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훗날 교황이 된 뒤에도 항상 그의 곁엔 어린이들이 있었고, 교황 선출 두 달 만에 바티칸 정원에서 로마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인의 집안은 어릴 때부터 가난했지만, 그의 부모는 늘 교육을 우선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매일 6㎞가 넘는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고, 이후 장학금을 받으며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특히 고전학과 철학, 신학 분야를 월등히 잘했다고 합니다.

1884년 주교품을 받고 만토바의 교구장 주교가 됐으며, 1893년 추기경에 서임됐습니다. 이후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10년 동안 헌신적으로 사목했습니다. 그리고 1903년 8월 제257대 교황으로 사도좌에 착좌했습니다.

비오 10세 교황은 보수적인 신학과 전례, 교회법상의 개혁을 단행한 교황으로 유명합니다. 성인은 교회법 개정에 착수하고, 불가타 성경개역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시편과 성무일도서 개정을 단행했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체계적인 교회법전 편찬 작업도 비오 10세 교황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매일 영성체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첫 영성체 연령을 낮췄으며, 병자 영성체를 완화해주는 교령을 발표하는 등 성체 신심의 중요성을 보여줬습니다.

성인은 근대주의 단죄에도 나섰습니다. 당시 근대주의와 상대주의는 가톨릭교회에 큰 위협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교회 교리 전통의 변화를 주장했던 근대주의와 상대주의 사상은 교회 가르침에 깊이 침투했고, 그는 1907년 교회 본질과 계시, 성경 주해, 성사 등과 관련한 근대주의 사상을 공식적으로 규탄했습니다.

비오 10세 교황은 1911년 조선대목구를 서울과 대구대목구로 분리시킨 교황입니다. 조선의 신자 수가 급격히 늘자 대목구 분리를 건의한 뮈텔 주교의 청에 따라 이를 들어준 것입니다.

그는 청빈한 교황이었습니다. 전임 교황이 사용하던 낡은 옷을 수선해 입었고, 보석이 박힌 십자가 목걸이도 나중에 알고 보니 모조 보석이었습니다. 교황이 가짜 보석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선종하기 전까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늘 “저는 가난하게 태어났으며, 가난하게 살았고, 가난하게 죽고 싶습니다”라고 했던 성인은 평생 가난한 이들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1914년 8월 20일 선종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수많은 이들이 전쟁 속에서 생명을 잃는 모습을 몹시 개탄하던 터였습니다.

생전 이미 ‘성인 교황’으로 불렸던 그는 1951년 복자품에 올랐으며, 1954년 5월 29일 비오 1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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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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