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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직 현장에서]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정철 신부(수원교구 단내성가정성지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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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앉으시겠습니다."

 "아고코고…"

 성지 미사 중 해설자가 앉으라고 하자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성지 성당에는 의자가 없다. 그래서 방석에 앉아야 한다. 젊은 사람들이야 괜찮겠지만 어르신들은 불편해 하신다. 그렇다고 의자를 놓자니 공간이 아주 비좁다. 어쩔 수 없이 방석을 놓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어르신들의 곡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불편하신 분은 미사 내내 그냥 자리에 앉아 계셔도 좋다고 했다. 어르신들은 "무릎이 안 좋아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 달라"며 멋쩍게 웃으셨다. 미사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나와 보니 어르신들이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에 버스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돌아가신 건 아닌 것 같았다. 무릎이 안 좋다고 하셨으니 산길로 이어진 순례길을 올라가신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한 분도 보이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두 시간쯤 흘렀을까. 버스로 하나 둘씩 모여드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어르신들은 하나 같이 나물이 가득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두 손에 들고 계셨다. 미사 시간에는 무릎이 안 좋다며 "아고코고…" 하셨던 어르신들이 무려 두 시간 동안 산에서 나물을 뜯은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니 예수님은 "난 아니야!"하는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성지에는 순례자만 오는 게 아니다. 봄이 되면 나물 뜯고 가을에는 밤을 따러 오는 신자도 있다. 심지어 가방에 호미를 넣어 오는 신자도 있다. 순교자 묘소 옆에 핀 진달래를 따서 봉지에 담는 신자도 있다. 때때로 단체 순례객이 오면 여기가 성지인지 공원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불판에 고기를 구워 먹는가 하면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떠들기도 한다.

 한번은 사무실 앞에서 관리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사람들이 계속 화장실을 오갔다. 가끔 성지에 와서 화장실만 이용하고 가는 단체 순례자들이 있기에 그런 줄만 알았는데 사무원 자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퇴근길에 주차장을 지나가는데 술판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놀라서 나가 보니 신자들이 준비해온 탁자를 펼쳐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순례자는 신앙 선조와 순교자들이 걸어간 길을 기도와 묵상을 통해 순례하는 사람이다. 또 성지는 순례자들이 기도와 묵상을 잘 할 수 있도록 해놓은 거룩한 장소다. 고객을 왕으로 모시는 서비스 업체가 아니다. 성지를 성지로 생각하지 않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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