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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직 현장에서] 성지는 성지다

권철호 신부 (서울대교구 당고개순교성지준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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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고개순교성지에는 옹기가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의미 없는 붓질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화가 덕분이었지만, 순교자의 얼을 담아내기에 그만한 재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의 경제적 토대가 옹기와 연결되어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100개가 넘는 옹기를, 그것도 깨서 사용할 것을 생각하면 제값 주고 산다는 것은 낭비였습니다. 해서 옹기를 제작하는 곳에 문의했습니다. 마침 신자였지만, 그 대답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일 년에 몇 번 가마를 때지도 않고 그중에 상품 가치가 없는 옹기는 몇 개 나오지도 않는다고 말입니다. 산술적으로 필요한 옹기를 구한다는 것은 몇 년이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렵사리 부탁하고 돌아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자신이 가업으로 옹기를 굽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그는 "이번 가마에 넣은 옹기 전체가 파손되었다"며 "아마도 당고개순교성지를 위해 쓰라는 의미가 아니겠느냐"고 말입니다. 우연이지만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뜻하지 않았던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당고개순교성지는 교적을 가진 신자가 없습니다. 교적을 둘 수 없기에 전적으로 봉사자들의 참여로만 운영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악하는 한 청년이 봉사하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음악에는 문외한이라 반신반의했지만, 그 성의가 괘씸(?)해 미사 때 허락했는데 감동의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더 많은 성악 친구들이 성지를 찾았고 뒤이어 앙상블과 합창단, 나아가 평일미사 때 악기로 전례를 풍성하게 해주시는 분들이 찾아왔습니다. 공지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저마다의 뜻을 갖고 순교성인들을 찬양하는 분들로 성지가 풍요로워졌습니다.

 성지 해설과 전례 봉사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불과 2년도 안 된 당고개순교성지에서 해설과 전례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소리 없이 가장 낮은 곳에서 화장실과 성당 청소를 대신해 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마치 신비의 퍼즐을 맞추어 가듯 그렇게 성지는 풍성해져 갔습니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이뤄져 가는 모든 것들이 저절로 `성지는 성지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되뇌게 합니다.

   옛날에는 순교성인들을 세상에 쓸모없다고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불온 세력으로 매도했지만, 오늘날에는 그 모범을 따르기 위한 신앙인의 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신앙의 신비한 퍼즐은 그렇게 오묘한 빛깔로 천상의 빛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이듯이 성지는 성인들의 전구 속에 자리하는 것임을, 성지가 왜 성지인지를 일깨우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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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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