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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을 입으며] 이석재 신부(목감본당 주임)

루카 할아버지와 판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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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재 신부
 
우리 성당은 서울 근교에 위치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형태를 보여주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신자분들이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때보다도 고해성사를 드릴 때가 가장 어렵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어르신들, 그리고 고해성사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시는 어르신들, 고해성사 순서도 모르시고 당신들이 하고 싶으신 말씀만 하시고 그냥 나가버리시는 어르신들 때문에 매번 성사를 드릴 때마다 난감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어르신들이 집중적으로 성사를 보시는 때가 또한 판공성사 기간이기도 하다.

2009년 사순시기, 어김없이 우리 본당은 사순 판공을 시작했다. 각 구역별로 본당에서 판공을 하기로 하고 판공성사를 시작했는데, 역시나 어르신들과의 실랑이는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매번 판공성사를 주다보니, 우리가 매년 부활과 성탄을 준비하면서 받아야 하는, 한국 교회에만 있는 이 고해성사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판공이라는 단어는 한국에서만 사용되는 용어로, 한자로는 ‘힘써 노력하여 공을 세운다’는 의미의 ‘판공’(辦功)과 ‘공로를 헤아려 판단 한다’는 의미의 ‘판공’(判功)이 사용된다. 그래서 전자는 교우 쪽에서 ‘판공을 받는다’고 할 때, 즉 1년 동안 힘써 세운 공로를 사제로부터 판단 받는다[찰고(察考)]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고, 후자는 사제의 입장에서 ‘판공을 준다’라고 할 때, 즉 1년 동안 세운 신자의 공로를 헤아려 판단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판공성사를 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러한 원래의 의미 보다는 평소에 고해 성사를 보듯이 내가 지은 죄에 대한 회개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과 부활을 준비하며, 내가 신앙인으로서 지난 시간동안 세운 공로를 생각해보고, 신앙인으로서 살아오면서 공로를 쌓기보다는 오히려 부족했던 점이 무엇이었는지 헤아려 살펴본 후에,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합당한 공로를 쌓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판공성사가 되어야 우리 교회가 오래전부터 지켜오고 있는 ‘판공성사’의 의미에 맞는다고 할 것이다.

고해성사가 신자들에게 부담이 되고 심지어는 두려움을 주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고해성사의 의미에 대해서 얼마나 신자들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무조건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식의 설명은 신자들이 편하게 고해소의 문을 두드리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에도 우리 교회가 지켜오고 있는 판공성사의 의미를 살려서 고해성사를 준비하도록 이끌어 준다면, 더 이상 고해성사를 어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도 1년에 두 번 꼭 판공성사를 보시고 성당에 오시는 루카 할아버지께서는 판공성사를 보시기 위해서 성당에 나오셨다. 가정형편이 어려우셔서 쉽게 신앙생활을 하실 수 없는 분임을 알고 있기에 늘 판공성사를 보러 나오시면 반가운 어르신이다.

할아버지는 1년에 이렇게 두 번 밖에 성당에 오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저에게 늘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내 손을 꼭 잡으시며 말씀하신다. 늘 죄인이라고 하시며 신부님 뵐 면목이 없다고 하시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는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릴 공로를 좀 적게 쌓으신 것뿐이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다음에 더 많은 공로를 쌓고 오시면 된다고 말씀드린다. 그리고 올해도 건강하시고 그래도 이렇게 판공성사라도 보시기 위해서 나오시는 할아버지의 믿음을 하느님께서도 다 아실 것이라고 말씀드린다. 그러면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신다. 올해도 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미소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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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9-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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