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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을 입으며] 안준성 신부 - ''무뎌진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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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준성 신부·평택대리구 청소년국장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어렸을 적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 검은 숫돌 위에 칼을 눕혀서 위 아래로 부지런히 움직이시던 -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 돌이켜보건대 이는 이가 빠지거나 날이 무뎌져서 더 이상 사용하기 곤란해진 칼을 다시금 재창조하는(?) 아버지의 거룩한 작업이랄 수 있었다. 숫돌에 무뎌진 칼이 갈리며 빚어낸 검은 물이 깨끗한 물로 씻겨 지면서, 곧 폐기처분 당할 뻔했던 칼은 어느새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예리했던 젊음을 되찾는다. 이제 이 칼은 자기의 소임을 다시 수행하리라.

신앙인을 신앙인으로 규정짓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일 것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단순한 차원에서의 믿음이 아니라 온전한 존재의 투신에서 비롯한 전인적인 믿음이다. 조금은 과장하여 세상사에 익숙하고 친숙해진 이들은 감히 꿈조차 꿀 수도 없는, 아니 꿈꾸기도 싫어할 그러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물질과 육(肉)에 얽매여 처세의 끈을 잡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포기를 가르치는 신앙의 진리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까닭이다. 따라서 신앙인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며 결단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은연중에 신앙인들이라 하면 으레 선하고 정직하고 정의롭고 양심적일 것이라는 속내를 비춘다. 그렇다면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께 귀의한 이들, 흔히 신앙인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물질과 육을 과감히 포기하고 스스로의 정신과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며, 믿음의 진리에로 곧 하느님의 뜻에로 온전히 나아가고 있을까? 이 물음에 신앙인들은 답을 해야만 한다.

물론 서서히 잠식되었던 것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교회 안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더니만, 이제는 그 그늘이 너무 커져서 많은 이들이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 마냥 지극히 익숙해져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림자는 다름 아닌 신앙인들이 그렇게 떨치고자 했던 유혹내지 ‘죄악’으로 통칭될 수 있는 그 무엇들이다. ‘적어도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라고 생각했었던 예리한 신앙의 잣대로서의 칼날이 무뎌진 까닭에,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과 말씀이 삶의 길잡이요 방향키가 아닌, 좀 더 편안하고 쉬운 삶에로 나아감을 저해하는 걸림돌이며 족쇄라는 세상적인 생각이 점차로 신앙인들 안에도 둥지를 트게 된다.

바로 이것이 신앙인들을 시나브로 무감각하게 무디게 만들어버리는 주범이 아닐까? 이미 허울뿐인 신앙인이라는 이름에 더하여 세상 사람들의 삶의 감각을 고스란히 따라하고 있으니, 때때로 그네들보다 더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렇게 정신과 영혼의 무뎌짐과 무감각해짐은 형식적이고 기계적이며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초래하여, 기쁘고 즐거워야 할 전례생활과 성사생활은 점점 더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다. 신앙인이라는 이름만 남았지 의식이 상실된 의무화된 신앙생활은, 부활과 성탄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곧 희생이니 보속이니 회개니 하는 그때그때의 특성을 살짝 가미하여 마치 이벤트화 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면, 이것이 우리 신앙의 현주소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취미생활도 아니요 여가생활도 아닌 온전한 투신으로서의 신앙생활을 하자는데 동의한다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또 당연하다는데 동의한다면, 익숙해져 있던 세상의 껍질을 벗고 정신과 영혼의 재무장을 통해 무뎌짐과 무감각해짐의 미로를 빠져나와야 하리라.

걸림돌이요 족쇄라고 착각했던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이 이 세상에서의 찌듦과 얼룩으로 무뎌지고 무감각해진 우리의 마음을 다시금 갈고 갈아, 예리한 정신과 영혼의 칼날로 다시금 재창조시켜주실 것을 믿으며, 온전히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은 어떨는지.

그래서인지 오랜 추억속의 그 소리가 오늘 유난히 그리워진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09-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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