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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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14주일 - 나는 무엇에 헌신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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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쏟을 대상

최근 언론에 별난 식당이 소개되었습니다. 한 끼에 5만8000원부터 시작한답니다. 전문가들이 개발한 여덟 가지 코스의 식사를 즐기는 동안, 이름만 대면 아는 사치스런 옷도 무료로 입혀줍니다. 갓 구워낸 고기가 너무 뜨거울까봐 전속 직원이 부채질까지 해주는 이 주방 특선요리는 사람이 먹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달에 문을 연 반려견 전문 식당 이야기입니다. 아동복지법이 정한 결식아동 급식단가가 한 끼 8000원 이상인 것을 감안하면, 끼니 굶는 아동 일곱을 먹일 돈을 개 한 끼 먹이에 쓰는 것이죠.

“이 아이는요~”를 연발하며 품에 안은 강아지를 쓰다듬는 견주의 흐뭇한 표정만큼, 그 반려견의 만족감도 클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국내산 메추리알과 노르웨이산 연어, 청정육 열정구이를 줄줄 외는 조리사의 설명이 강아지가 아니라 견주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지요.

사랑하는 개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주려는 저 견주의 마음처럼, 정을 주고 사랑을 주고 마음을 쏟을 대상을 찾아서 아낌없이 주머니를 여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취미에 마음을 쏟고, 사치품에 마음을 쏟고, 남들 앞에 으스댈 것에 온통 마음을 뺏긴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헌신할 대상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현실을 확인합니다.

정향의 틀과 헌신의 대상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1차 세계대전의 광기에 큰 충격을 받고, 사람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한 바 있습니다. 그가 얻은 답은 ‘정향의 틀’과 ‘헌신의 대상’이었습니다. 내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사고방식(정향의 틀), 그리고 내가 마음을 쏟을 대상(헌신의 대상), 이 두 가지가 인생에 확실한 기초와 중심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프롬에 따르면 종교가 하는 일은 바로 ‘정향의 틀’과 ‘헌신의 대상’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인간은 우연히 세상에 던져졌다가 흙먼지로 끝나버릴 존재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스스로 묻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을 주고받을 대상을 찾지 못한 외로운 영혼은 방황합니다. 개나 고양이에, 게임 속 캐릭터에, 취미거리에 열광하는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방황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멍에를 진다는 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이 구절이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일 텐데,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멍에라는 말은 그 어감부터 탐탁지 않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6)는 말씀 같으면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텐데, “멍에를 져라”는 말이 위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공생활을 보내셨던 1세기 무렵의 유다 사회가 “멍에를 진다”는 말을 어떤 뜻으로 썼는지 알아봐야 합니다.

랍비 문헌 중에서 미쉬나는 누구든 먼저 하늘나라의 멍에를 져야 하며, 다음으로는 계명의 멍에를 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미쉬나 Bera 2;2) 하늘나라의 멍에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믿으며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하늘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의미하니까, 하늘나라의 멍에는 곧 하느님을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지요. 또 계명의 멍에는 왕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랍비 네후냐는 “누구든지 스스로 토라의 멍에를 메는 자는 세상 나라의 멍에와 힘든 노동의 멍에를 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토라의 멍에를 벗는 자는 세상 나라의 멍에와 힘든 노동의 멍에를 맨다”(미쉬나 Avot 3,5)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토라의 멍에를 진다는 것은 토라를 열심히 연구하며 토라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지 않는 이는 세상의 일에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이렇게 ‘멍에를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또는 어떤 사람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랍비들과 예수님의 말씀에서 언급하신 멍에는 소나 말에게 억지로 일을 시키는 의무, 또는 짐이라는 뜻과는 관계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곧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다른 무엇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에 안식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편하게 하시는 하느님

예수님의 멍에를 지는 것,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왜 우리를 편하게 할까요?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하느님의 속성이 오늘 듣는 말씀 전체에 새겨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제1독서 즈카 9,9)이면서도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폭력을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즈카 9,10)하시는 분은 남을 이기고 남의 위에 서려는 인간의 욕망을 내려놓게 하시고 당신의 영을 우리 안에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제2독서 로마 8,9)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로마 8,9) 사람은 하느님을 따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집니다.(마태 8,29)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 다시 말해 세상에서 인정받고 남위에 서는 위치에 오르려는 사람은 “고생하며 무거운” 삶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쟁하는 다른 사람들과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헌신하는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세평에 흔들리지 않고 철부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 주님의 멍에를 지고 하느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이 드러내시는 신비에 기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신비, 그 사랑이 우리 삶의 시작이요 완성이라는 신비 말씀입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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