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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37. 관상기도(「가톨릭교회 교리서」 2709~272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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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서 주인공 어니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이 생긴 위대한 인물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을 듣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기다렸지만,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사람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노인이 된 어니스트에게 한 시인이 “보시오, 어니스트씨야말로 저 바위 얼굴이랑 비슷하지 않은가요?”라고 말합니다. 큰 바위 얼굴을 지닌 사람을 기다리던 어니스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바위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가 아르스의 본당에 있을 때 감실 앞에서 기도하던 한 농부는 기도에 관해 묻는 신부님에게 “저는 그분을 보고 그분은 저를 보고 계십니다”(2715)라고 말했습니다. 관상기도는 하느님을 바라봄입니다. 그러나 겉모습이 아닌 하느님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이시고 사랑 자체이십니다. 태중에 있는 아기도 부모를 관상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겉모습은 볼 수 없어도 그들 사랑의 마음은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마음은 가난과 신앙 안에서 주님을 찾고 만나는 장소가 됩니다.”(2710)

하느님의 마음을 바라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느님을 닮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이 내 마음 안에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눈길은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 줍니다.”(2715)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의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어니스트가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모습으로 변화된 것과 같습니다.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을 바라보는 큰 바위 얼굴의 시선에 조금씩 자신을 맞춰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관상기도는 “사랑하시는 성부의 뜻에 겸손하고 비어있는 마음으로 승복하는 것”(2712)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바라보는 데도 능력이 필요합니다. 개미가 인간을 바라본다고 인간을 이해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타볼산에서 예수님 빛의 본성을 잠깐 보았을 뿐인데 겁에 질려 까무러칠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관상기도는 나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려는 용단이 요구됩니다. 마치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청한 베드로처럼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사랑에 도전해야 합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바라보고 그분의 시선 안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관상의 기도 단계에서는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자신을 일치시키겠다는 영웅적인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누군가의 시선에 나의 시선을 고정한다는 말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 시선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2715)합니다. 완전한 나의 자기 부정이 완전히 하느님을 긍정하는 일입니다. 그분 “수난의 사흘을 생생하게 체험”하기 위해 “신앙의 어둔 밤에 머물기를 동의할 정도에 이르면, 관상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기도가 됩니다.”(2719)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
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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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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