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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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 부르심, 새로운 삶에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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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시기 서두에서 듣게 되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선포와 네 명의 어부들이 새로운 삶에로 부르심 받는 것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과 ‘맞짱뜨기’를 하시며 당신의 소명을 확인하셨습니다. 좁은 길을 선택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갈릴래아로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르코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첫 목소리를 듣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는 외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등장으로 하느님의 다스림이 ‘현실’이 되었다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선포는 두 가지 성격을 포함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언’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호소’입니다.

“때가 찼다”고 하셨습니다. ‘때’는 일반적으로 순차적 일상의 시간에 해당하는 ‘크로노스’와 하느님의 ‘때’를 나타내는 ‘카이로스’로 구분합니다. 크로노스가 수평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한다면, 카이로스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시간 안에 수직적으로 침투하는 하느님의 개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때가 찼다’고 번역하였지만, 사실 이 문장은 ‘때가 차게 되었다’라는 수동태 문장입니다. 분명한 하느님의 개입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변혁의 선포는 “요한이 잡힌 뒤에”(1,14)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 바싹 다가선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요한과 똑같은 선포를 하십니다. ‘회개’의 외침이 그러합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선포가 같은 것이며 연속선상에 있음을 증명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존재로 주님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며 새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문이었습니다.

‘회개’는 성경의 메시지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 하실 수 있도록 그분을 향하여 돌아서는 마음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우리가 취할 우선적 행동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회개하다’와 ‘믿어라’라는 동사는 미완료형 시제로서, 이것은 지속적인 현재 상태를 나타냅니다. 궁극적으로 전자가 계속될 때 후자도 지속됨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신앙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래하는 하늘나라를 장엄하게 선포하신 후 어부 네 사람을 부르시며 그들을 새로운 삶에로 초대하십니다. 마르코복음은 루카복음과는 달리 이미 복음 서두에서부터 제자의 부르심이 이루어집니다. 저자 마르코의 제자에 대한 이해는 그들이 예수님의 수난 시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그분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겼기에, 예수님 공생활 시초에 제자의 부르심을 배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부 네 사람을 부르는 이야기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러면서도 비슷한 소명이야기가 엮어져 있습니다. 첫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의 공통점은 ‘어부’라는 직업과 그들이 ‘형제’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후 그들이 보인 동일한 행동입니다. 시몬과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제베데오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짧게 서술된 소명 이야기에 각각 다른 두 형제들이 주님께 부르심을 받는 내용이 합쳐져 있습니다.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는 상황 설명과 소명, 추종의 순서로 짜여 있습니다. ‘부르심’과 ‘따름’ 사이에 그 어떤 간격도 없습니다. 심리적 갈등이나 반대, 거부가 없습니다. 그들의 이 즉각적인 순명을 성경은 ‘곧’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특별히 마르코복음은 긴급하고 생생한 장면을 강조할 때마다 ‘곧’이라는 단어를 통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제자들의 행동에서도 그러한 긴박성이 보이고 있습니다. 부르심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따름의 행위 주체는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고, “그들이” 아버지와 일꾼을 배에 남겨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강제적인 것이 아닌 스스로의 선택이며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리스어 성경에 ‘오너라’라는 동사 뒤에 ‘오피소’(οπ?σω) 즉 ‘이리로’, ‘따라’, ‘뒤로’라는 부사어가 첨가되어 있음에 유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시는데 그들의 살아왔던 방향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이리로 혹은 이 새로운 방향으로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랐습니다.(1,18) ‘따랐다’는 동사는 그리스어로 ‘아콜루데오’(?κολουθ?ω)인데, ‘일치’ 혹은 ‘하나’를 의미하는 접두어 ‘아’(?) 와 ‘길’(κ?λευθο?) 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단어로 ‘같은 길을 함께 가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마르코가 생각하는 제자의 신원이 다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마르코복음에 46번이나 등장하는 제자는 ‘배우는 사람’으로서 그분과의 친밀성 안에서 ‘같은 길을 함께 가며’ 삶의 기준과 가르침을 전해 받는 도제관계입니다.

이렇듯이 부르심을 받는 첫 제자들의 모습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대로 사는 삶에 대한 모범답안을 제시합니다. ‘회개와 믿음’의 요구에 그들이 ‘버림과 따름’으로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부르심이 일어난 때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갈릴래아의 일상적 풍경 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르시는 말씀을 듣자마자 즉시 순종하며 익숙함을 버리고 낯섦과 새로움, 불투명함을 받아 안은 용기있는 사람들입니다. 익숙한 곳에는 없는 긴장과 변화의 도전을 단박에 수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전과 이후는 완연 달라집니다. 행동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달라집니다. 그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다른 이들을 하느님 나라의 현실로 초대하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세상과 다른 이들을 향하여 그들이 선포할 내용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 그분 자체’입니다. 첫 제자들이 많이 부러운 오늘입니다.

※ 임미숙 수녀는 독일 빌헬름 프리드리히 본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대구 가톨릭 신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임미숙 엘렉타 수녀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4-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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