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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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사순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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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창세 9,8-15

제2독서: 1베드 3,18-22

복음: 마르 1,12-15



사순 제1주일 복음은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받으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때에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아버지의 기쁨에 넘친 환호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가득 채운 그 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십니다. 황량한 광야에서의 유혹이라는 사건 이면에, 성령께서 계신다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께서 사탄에게 유혹받으신 것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도, 예기치 않게 치고 들어온 방해거리도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의 유혹은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시간이라고 귀결됩니다.

세례 때 예수님 위로 내려오셨고, 또 권위 있는 가르침과 치유의 능력을 주시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십니다. 마태오복음이나 루카복음은 조금은 순화된 표현으로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유혹받으셨다고 보고하지만, 마르코복음은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에 ‘내던지셨다’라며 역동적이고 생생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내던지셨다’(?κβ?λλω, 에크발로)는 강한 의미의 단어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구마 기적에서 악령을 ‘내쫓으셨다’고 할 때 사용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차 없이 몰아내는 성령의 역동적 이끄심만 보아도 광야에서의 시간은 선택사항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이야기는 공관복음 전체에서 등장합니다. 마태오·루카복음은 예수께서 40일 동안 ‘단식하셨다’는 정보 외에도, 사탄으로부터 ‘세 가지의 유혹을 받으셨다’고 제법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코복음은 광야에서의 유혹사화를 매우 간략하게 서술할 뿐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종류의 유혹을 받으셨는지, 또 몇 가지의 유혹을 받으셨는지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속도감 있는 짧은 문장에는 눈 밝은 이라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저자의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에는 예수와 마귀들, 그리고 예수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인 대립과 분쟁으로 긴장이 가득합니다. 뿐만 아니라, 스승의 ‘특별과외수업’에도 불구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까지 서술되며 갈등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르코는 예수의 삶 전체가 다양한 사람들과의 첨예하고도 치열한 논쟁과 갈등의 대립구도임을 강조합니다. 이런 이유가 광야에서의 유혹 이야기를 담박하게 그려내는 의도로 보입니다. 유혹이 ‘단지 광야에서’ 있었던 일회적 사건도, 더군다나 몇 가지만으로 국한된 것도 아니라는 메시지가 선명해지도록 군더더기 없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마르코는, 예수께서 유혹이 끝난 후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며 무심한 듯 들려줍니다. 예수께서 들짐승과 함께 지내시고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는 묘사는 평화로웠던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이 단단하고 압축적인 구절에는 그러한 평화의 이미지를 넘어 매우 애잔한 울림이 함께 녹아있습니다. 이 표현에 박해를 견뎌내야 하는 그 시대를 향한 존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사탄의 공격을 받으신 후 천사들의 시중 받음을 보여줌으로써 사탄의 공격에 둘러싸인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영적 도움이 주어질 것임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는 당시 박해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이토록 우아한 방법으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혹의 40일을 통과하고 하느님 나라의 통치를 선언할 준비가 된 완전한 사람,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서 나오셨습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십니다. ‘잡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파라도데나이’(παραδοθ?ναι)는 ‘넘겨졌다’는 의미입니다. ‘잡힌 것’은 곧 그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마르코는 요한과 예수의 죽음에 묘한 연결점을 만들어 냅니다. 두 사람 모두 불의하게 또 불의한 자들의 손에 넘겨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이미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첫 선포가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이었음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갈릴래아로 오신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며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십니다. 여기 ‘회개’라는 단어는 흥미로운 변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회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함’(???)은 본래 ‘숨을 들이마시고 깊은 숨을 내쉬다’라는 뜻으로 슬픔, 통한의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영향력 아래 ‘회개’를 표현하는 용어가 ‘돌아오다’, ‘되돌아서 가다’라는 ‘슈브’(???)로 대체되면서 심도 깊은 의미가 덧입혀졌습니다. ‘슈브’라는 단어로 대체된 것은, 회개가 잘못을 느끼는 정도를 넘어서 변화를 위한 ‘행위’임을 인지한 날카로운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회개는 잘못에 대해 그저 탄식하고 회한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느낌’이 아니라 ‘전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적극적인 개념으로, 하느님을 향해 되돌아가는 방향전환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진정한 의미이며 또한 사순절이 우리를 초대하는 방향이기도 합니다.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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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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