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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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사순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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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이야기 한가운데에, 우리 신앙의 핵심을 잘 요약한 구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3장 16절의 말씀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복음서를 읽고, 전체를 요약할 만한 한 구절을 딱 짚어내라고 한다면 바로 이 구절을 짚어낼 수 있겠지요. 예쁜 말로 깊은 의미를 담아낸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을 위로했을 것이고, 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 사랑 그리고 심판

말씀의 축을 이루는 두 낱말을 골라보라면, ‘사랑’과 ‘생명’이겠지요. 굳이 한 단어를 더 골라내야 한다면 결국은 ‘사랑’일 겁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가장 좋아하고 줄곧 강조해 온 말이기도 하지요. 사랑한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마다할 신앙인이 없겠지요.

그런데 복음 이야기는 또 다른 낱말 하나를 끄집어냅니다. 사랑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오히려 저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낱말입니다. 바로 ‘심판’입니다. 어딘가 모르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 낱말은 사랑이라는 낱말을 마주하며 복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심판’은 ‘사랑’과 함께 이야기를 떠받치는 또 다른 기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심판은 사랑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심판을 이해하면 사랑마저도 알아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애써 고개를 돌려 ‘심판’이란 낱말을 마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다 어떤 마음을 담고자 하셨을까요.


■ 심판은 정말 그런 것인가요

심판이라는 말을 마주하면 어떤 생각부터 드시나요. 이 막연한 낱말을 들여다보게 된 것은 사제로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로 사제를 찾지 않습니다. 대부분 어려운 이야기이지요. 그렇게 사제는 세상의 어두움을 마주합니다.

장사하면서 사람을 속였다고 자책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되물어 보니 어떤 업계의 시장구조는 남을 속이지 않고서는 먹고 살 수 없는 모습이더군요. 가족이나 남편을 미워한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되물어 보면, 가정 폭력이나 무능력에 수도 없이 시달린 분이 많았습니다. 수십 년도 전에 아이를 지웠다는 이야기 뒷면에는, 무책임한 남성이나 가난이라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벌어진 일의 이면에는 언제나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떠나고 난 자리는 무척 막막했습니다. 무참해진 마음으로, 사람들의 죄는 짓는 게 아니라 빚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은 절반 이상이(혹은 대부분인지도) 태어나면서 결정나더군요. 질문이 생겼습니다. 어떤 시대에, 어떤 나라에, 어떤 성별로, 어떤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는가에 따라 한 인생이 결정된다면, 그렇게 노력 여하와는 상관없이 어떤 삶으로 내몰리게 된다면, 그리고 생의 끝에서 그 삶을 심판해야 한다면, 섭리의 이름으로 삶을 계획하신 하느님께도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질문과 함께 항변하는 마음, 따져 묻고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 성경이 말하는 심판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매다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심판은 우리가 가진 사법적인 개념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되더군요.

성경에서 심판은 계약과 상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를 떠올려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준비해 놓되 반으로 갈라 잘린 반쪽을 마주 보게 차려놓게끔 하시고, 그 사이를 오가시며 계약을 맺으셨습니다.(창세 15장 참조) 이처럼 구약의 사람들은 짐승을 반으로 갈라놓고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이 깨질 때, 그 관계가 그 짐승처럼 갈라져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습니다. 그것을 심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심판은 계약을 어겼을 때, 계약을 맺은 두 당사자가 서로 그 ‘관계를 끊어내는 것’입니다. 다시는 하나가 되지 못하게 ‘분리’시켜 버리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의 심판이라면,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사람들을 심판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버린 적은 있어도, 하느님이 사람을 버린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다시 들립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어져 버린 관계를 되돌리시고자 아드님까지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성을 살려주실 때,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와 논쟁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8,15)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과 사람을 갈라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킬 방법을 찾으신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이라는 말을 통해,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려 하셨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저버릴 때도, 당신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줄곧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랑’과 ‘심판’을 다시 마주 놓습니다. 두 낱말을 긴장하게 하는 것은 오해였을 뿐, 심판이라는 낱말은 사랑이란 낱말을 도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있군요. 뒤늦게나마 말씀 사이로 예수님의 손이 슬몃 보입니다. 우리가 놓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꼭 잡고 있을 그 손. 다시 한번 그 손을 꼭 잡고, 신앙의 여정을 걸어보겠노라고 다짐해 봅니다.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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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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