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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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실천하는 사랑, 영원한 생명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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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휴가철이 시작됩니다. 어떤 휴가를 계획하셨는지요? 교우님 모두가 어디에서나 주님을 모시고 진정한 쉼의 시간을 가지시길 원하며 하나,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아무리 짐이 많아도 제발 매일미사 책이라도 꼭 챙겨가 주십시오! 교회는 매일미사 책에 무려 열 장이 넘는 지면을 할애하여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서나 미사참례를 거르지 않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느님께 찬미 드리기 원하는 이 간절한 원의를 팽개치지 말아주시길 바라고 바랍니다.

즈음이면 늘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쉼 없이 주님을 찬양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라는 고민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과 조우하는 행복을 누리시는지 여쭙고 싶고 참으로 그리 살아주시길 원하는 마음이 큰 탓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삶에서 제일 어려운 것, 나아가 곤혹스러운 것은 매 순간순간의 생각과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마도 사탄이 극악무도한 악을 행하도록 유혹한다면 우리는 망설임 없이 사탄과 맞설 것입니다. 단호히 거부하고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 같은 범인에게 굉장한 것이나 대단한 것으로 시험하지 않습니다. 늘 우리가 일상 안에서 수시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 선의 무게와 악의 무게를 비슷비슷한 중량감으로 위장합니다.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괜찮아서 탈이 없을 것처럼 포장합니다. 모호하게 느껴서 불분명하게 인식하도록 마음에 올무를 놓습니다.

우리가 살아내는 삶의 문제는 언제나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결과 또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지 않기 일쑤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믿음의 문제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요. 믿음이 희미해질 때, 삶은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빛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때문일까요? 오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추가해서 들려주십니다.

그날 하느님의 율법을 앞세우면서도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던 “어떤 사제”와 레위인들은 주님께서 날린 강속구에 뒤통수가 얼얼했을 것 같은데요.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대상에서 탈락될 것이라는 주님의 ‘돌직구’가 매섭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경고 메시지는 분명하고 명료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똑 부러지게 말씀해 주시니까요.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주님께서는 아픔을 지닌 이웃을 향한 연민,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살아가는 “가엾은 마음”만 잃지 않아도 몸소 끝까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하십니다. “가엾은 마음”만 있다면 기꺼이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 아니라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소홀함이 없도록 조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진리를 밝혀주십니다.


사랑은 끝까지 마음을 쏟는 최선의 배려임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희생이란 기꺼운 사랑의 결과일 뿐임을 알려주십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측은하다는 감성적 ‘생각’이 아니라 손해를 감수하면서 끝까지 보살피는 ‘행동’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새기게 됩니다. 이웃의 곤고함을 “가엾다” 여기는 생각만으로는 사랑에 미치지 못하기에 겨우 간단한 응급조치만 해주고서 돌아선다면 완성된 사랑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라 헤아립니다.

때문에 나의 일이 급해서 “반대쪽으로”가 버렸던 사제나 자신의 정결한 믿음이 더럽혀질 것을 염려하여 “반대쪽으로” 지나쳤던 레위인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지 않은지, 꼼꼼히 살피라는 당부로 듣습니다.

그날 사마리아인처럼 소중한 “두 데나리온”을 일면식조차 없는 가엾은 이를 위해 흔쾌히 사용하는 마음 폭을 지녔는지, 이웃의 나중까지도 무한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통 큰 배포를 가졌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의미라 싶습니다. 단지 “가엾다”는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 자신이 매우 선하고 엄청 착하게 살아가는 양 여기진 않는지, 심중을 꼼꼼히 뜯어보라는 말씀이라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기를 원하시는 것이라 싶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고쳐서 살아갈 것을 강권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갖은 핑계를 대며 ‘생각’으로만 사랑하고 ‘말로’만 자비를 베풀려는 우리의 인색함을 슬퍼하신다는 고백이십니다. 아픈 이웃을 위해서 내 노새를 내어주고 터벅터벅 두 발로 걷기를 마다지 않는 모습을 오늘 우리에게서 보고 싶다는 고백이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넘어야 할 가장 험한 난관은 “최선의 방법을 알면서도 최선의 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처지”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를테면 “이번 휴가 기간에는 성경을 꼭 읽어야지”라고 다짐했으면서도 성경은 무겁다는 이유로 부피가 작은 매일미사 책으로 바꿔 넣거나 “기도를 많이 바치겠다”라고 다짐했으면서도 그저 더 먹고 더 떠들고 더 흥분하느라 손에 묵주 한 번 쥐어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구체적으로 행하는 사랑만이 영원한 생명의 열쇠입니다. 더딘 듯 보여도 주님의 방법이 가장 힘이 셉니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처럼 말하고 주님처럼 행동하려는 의지가 소중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허세이며 무의미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상대를 좋다 하고 내가 받은 사랑만큼만 응대하는 세상의 방법으로는 주님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상대의 친절에 따라 내 마음과 행동이 적절히 반응하는 꼼수는 복음인이 사용할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크고 웅대한 업적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 살아주기만 원하십니다. 당신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마음이 세상을 살리고 움직이고 변화시켜서 모두가 함께 더불어 밝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과 맺은 사랑을 변함없이 지켜달라고 간청하십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과 마음을 합하여 예배드릴 것을 원하십니다. 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은혜를 선물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침내 주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이웃으로부터 “나도 주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는 고백을 듣게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여름의 한 가운데, 주님의 심정이 고스란한 복음의 이정표를 놓치지 말아 주십시오. 믿음의 나침반이 알려주는 올바른 방향을 선택해 나아가 주십시오. 하여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주님의 권고를 기억하여 ‘하지 않고’ 물러서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살아내 주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기쁨과 행복을 살아가시길 두 팔 벌려 축원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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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07-09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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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4장 20절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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