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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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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겨선 안 되는 ‘끝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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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감정 낭비 중의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나와 너 사이의 지배력과 존재감을 비교하며 서열을 매기는 작업입니다. 내 존재가 너에 비해 우월한지, 어렵게 획득한 권력과 지위는 안전하게 보존되고 있는지, 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존재감을 확인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불행한 노동은 누구와 비교되느냐에 따라 만족감이 달라지므로 끝도 없고 승산도 없으며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소모전입니다. 성공하고 출세하느라 진짜 삶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 집요하게 따라붙는 비극이며 쓸모없는 악순환이기도 합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은 “하느님, 당신은 가련한 이를 위하여 은혜로이 집을 마련하셨나이다.”라는 화답송의 후렴으로 요약됩니다. ‘가진 것’으로 타인 위에 군림하고 막대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가지지 못해서’ 혹은 ‘가진 것이 없어서’ 온전히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를 증명해야 하고, 그렇게 절실한 노고와 아픔으로 점철된 인생이라 하더라도 그 가난함을 온전히 끌어안고 자기만의 꽃을 피우고 빛이 되는 삶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루카복음에서 이러한 초대는 모두 3번 소개되고 오늘 본문은 그 마지막 때에 발생합니다.

첫 번째 초대는 7,36-50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자를 만난 이야기인데, 진정한 정의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구현됨을 알려줍니다. 두 번째 초대는 11,37-54에 소개되며 예수님이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이를 비난하자 전통과 관행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선언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수종을 앓던 사람을 안식일에 치유하신 사건(14,1-6) 다음에 등장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될 이들은 바로 그렇게 죄인으로 치부되고 소외되며, 그래서 더욱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구원을 희망해온 이들임을 알려줍니다.


■ 초대받은 이들

보편적으로 잔치나 행사에 초대될 때 앞자리 혹은 윗자리에 배정된다는 것은 초대한 사람이 초대된 이의 존재와 권위를 높이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통념을 거부하시고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끝자리에 앉아라.”(루카 14,8-10)고 하십니다. 이는 높은 자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주입하시는 것도, 윗자리에 앉으려는 마음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단순하게,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윗자리에 앉게 되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방법은 이러합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0절) 다만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세상의 처세술과 구별되는 원칙이 내포되어 있는데, 영광과 영예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마련하고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너를 초대한 이”가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라고 말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또 한 가지 구별되는 원칙은 하느님의 축복은 그 은총을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더욱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이고 ‘선물’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2-14절은 초대의 대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13-14절) 물론 여기에서 부각된 것은 루카가 시종일관 견지하는 고유한 비전, 곧 구원은 가난한 이들과 취약한 조건에 놓여있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진다는 주제입니다. 사실 이러한 인식은 구약시대와 당시의 통념을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기 하권 5,8은 “다리 저는 이와 눈먼 이는 궁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예수님의 시대 조금 전에 활황을 이루었던 쿰란 공동체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다리 저는 이와 눈먼 이, 듣지 못하는 이는 공동체 안에 회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러한 통념을 단번에 뒤집어 놓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보답할 길이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보답할 능력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들은 바로 그 가난 때문에 온전히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이들이고,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 누구도 의존할 수 없어서 철저히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를 증명해야하는 이들이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가난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삶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전히 주인공이 된 그들은 하늘나라의 잔치에서도 당연히 가장 우선적으로 초대되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 겸손한 이들

이러한 가르침은 제1독서에도 그대로 반영됩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집회 3,18) 이 문장을 통해 집회서의 저자는 온유와 겸손, 자선을 이웃에 대해 가져야 할 기본적 자세로 강조합니다. 특별히 본문은 선물로 타인의 환심을 살 수 없는 이들에게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17절)고 하는데 “온유하게 처리”하는 것이 선물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

제2독서는 우리 안에 있는 고유한 존엄과 품격을 선언하고, 이로써 왜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 명예나 영광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히브 12,22-23)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천상의 맏아들”이 된 이들이기에 세속적인 처세나 성공에 그다지 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가난과 착취, 모욕과 무시가 일상이 된 삶이라 해도, 자기 존재만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실재이기에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며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속물적 불안과 비겁한 조바심, 구차함이 일상이 되어 아무리 지체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매 순간 자신을 남과 비교하느라 정작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삶은 잃어버린 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에 지극히 ‘평범’하지만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며 온전히 자신과 이웃을 보듬고 사는 ‘비범’한 이들을 성서는 ‘가난한 사람들’(아나빔)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의 보잘것없는 하루하루는 성실한 해방의 역사가 되어 누구보다 아름답고 온화한 빛을 내며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게 됩니다. 아무리 조용하게 끝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최상층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부질없는 권력과 공허한 허세에 빠져있다면 역사는 이들 중 과연 누가 선택된 자들인지를 단호하고 분명하게 식별합니다. 이것이 역사가 감당해온 직무이며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진정한 투쟁과 개혁은 맹렬한 분노로 핏발선 눈을 부릅뜨며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서로를 보듬는 열망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신비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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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08-27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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