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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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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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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시종일관 주지하는 인간관은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형성된 ‘계약 평등 공동체’라는 점입니다. 햇빛, 공기, 물은 누구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하느님만이 유일한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것의 관리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유대 안에서만, 평등하게, 이 요소들을 공유할 권리를 갖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이 신성한 의무를 무시한 채 사적 소유가 허락되지 않은 요소들을 사유화하여 자본을 만들었고, 급기야는 계급 간의 선이 분명한 불공정 사회를 만들었으며, 처참한 착취와 서로에 대한 혐오로 심각한 대립과 양극화를 양산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하여 소외와 낙오를 만들어내고, 우아한 선긋기를 통해 열등한 것, 이질적인 것, 불편한 것은 자기 영역에 허락하지 않는 지독한 배타성을 고발합니다.


■ 복음의 맥락

이번 주 복음의 내용은 지난 주(연중 25주)에 읽었던 ‘약은 집사’에 대한 내용(루카 16,1-13)과 대조를 이룹니다. 약은 집사는 “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만들어”(16,9) 살 길을 마련하였다면, 화려한 옷을 입고 늘 잔치를 벌이던 오늘 복음의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있던 거지 라자로를 상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지난 주와 이번 주의 본문들은 모두 도입부분에 “어떤 부자가 … 있었다.”(그리스어 ‘엔 플루시오스’)라는 동일한 표현을 배치함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16,1절과 19절) 교회는 두 주간의 대조 본문을 통해 ‘부와 재물’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을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말을 건네지 않는 것

“어떤 부자”라고 지칭되고 있는 인물의 묘사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그에 대한 묘사들이 화려함과 즐거움에 집중되어 있지, 그로 인한 방탕함이나 환락의 부도덕함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19절 참조) 라자로에 대해서도 그의 지독한 가난과 비참은 묘사되어 있지만 그의 윤리적 태도와 덕행들은 표현되지 않습니다.(20-21절 참조)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또 다른 장치는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던 ‘선’(線)에 대한 것입니다. 이 선으로 인한 분리와 차단은 그들 사이에 그 어떤 상호 관계나 교류, 교감도 불가능하게 했는데, 바로 대문 앞에 존재하던 라자로의 고통을,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매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소통의 불능 상태야말로 진정한 지옥의 실체가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부자는 죽어서도 라자로에게 직접 말을 건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주십시오.”(24절)라며 아브라함과 얘기할 뿐입니다. 결국 지상에서의 선긋기는 저승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그들 사이에 “큰 구렁”(26절)을 만들었고, 절실한 고통 중에도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본문의 후반부는 무엇이 사후에 그들의 운명을 역전시켰는지 그 원인을 알려주는데 중요한 단어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언자들’입니다.(23.25.29.31절 참조) 아브라함의 등장은 부자와 라자로가 모두 유다 공동체에 속해있음을 알리고, 동시에 그들이 지켜야 할 계약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모세오경의 여러 구절은 같은 동족을 돌봐야 할 책임을 율법으로 명시하고 있는데(탈출 22,20-26; 신명 8,12-14; 15,7-12 참조) 특별히 신명기 법전에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 가난한 그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된다 …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 너희 마음에 비열한 생각이 들어 … 괄시하고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신명 15,7-9)고 선언합니다. 부자는 바로 이점을 무시했던 것이고 그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위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 부자가 고통 속에 지내게 된 것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즉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계약과 그에 따른 율법을 실행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자는 지상에 남은 형제들에게 이를 알려주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분명히 제시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 아랑곳하지 않는 것

복음의 부자가 누렸던 화려한 일상은 제1독서에 더욱 섬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극심한 물질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를 비판하면서, 사치와 문란함으로 야기된 당시의 사회악과 부조리를 고발합니다. 상아로 만든 침대와 안락의자, 넘치는 음식들, 환락을 부추기는 음악, 값비싼 술과 요란한 치장들…. (아모 6,4-6 참조) 모두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키는 감각적 요소들이지만, 이런 것에 매이고 중독되다 보면 국가와 사회가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6절) 상태로 의식이 마비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고 그것을 따르려는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국가와 사회, 타인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게 된 상태는 사실 하느님에 대한 관심을 상실했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인 것입니다.


■ 그러나 당신은

제1독서의 “걱정 없이 사는 자들”과 “마음 놓고 사는 자들”에 반대되는 삶을 사는 이들을 제2독서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규정합니다.(1티모 6,11) 그들은 “상아 침상”과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는 이들이고 “믿음을 위해 훌륭히 싸우는” 사람들이며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입니다.(11-12절) 한국어 번역본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리스어 본문의 첫 문장은 “그러나 당신은”(그리스어 “수 데”)으로 시작합니다. 한국어 성경에서처럼 “하느님의 사람이여”로 시작해도 문맥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그리스어 본문은 굳이 ‘접속사’(그러나)와 ‘인칭대명사’(당신)를 명시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어조를 바꾸어 무언가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 하느님의 사람이여”라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일반 사회와 분명히 차별되는 특징을 가져야 함을 피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돈과 재물을 소유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약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기에 죄가 됩니다.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가 살던 시절은 어쩌면 우리 시대보다는 더 ‘공동체적’이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라자로는 그나마 부자의 집 대문 앞에라도 있을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은 ‘철저한 보안유지를 자랑하는 동네’에는 얼씬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고위층이 사는 곳에는 쓰레기도 구걸하는 걸인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아한 선긋기로 수상하거나 불편함을 주는 타인을 배제한 사회 안에는, 교양과 예의는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을 향한 진정하고 정직한 존중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옳고 정당한 이해를 갖는 것, 그 은총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회개’(메타노이아, 루카 16,29)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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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09-24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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