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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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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어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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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바쿡 예언자를 좋아합니다. 아니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는 게 옳을 것도 같군요. 제법 긴 시간을 하바쿡 예언자의 당돌함과 ‘되바라진’ 모습에 비위가 상해서 마뜩지 않았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때문에 저는 오늘 여러분께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고작 3장에 불과한 짧은 글이니 꼭 읽어주시길 청합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이 짧은 성경에 담긴 믿음의 엑기스를 뽑아 간직하게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눈치를 보듯이 성당에서만 쩔쩔매는 시늉을 하는 것을 신앙생활인 양 오해하는 못난 신자가 사라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돌아가는 일이 갑갑할 때, 하느님 앞에서 진심으로 고뇌하며 “어찌하여”라며 야무지게 하느님께 항변할 수 있는 세상의 대변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앞에서 하바쿡처럼 당당하고 하바쿡처럼 진솔하며 하바쿡처럼 지혜롭기를 간곡히 청하는 것은 옳고도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바쿡처럼 하느님의 응답을 들으며 하느님께서 얼마나 ‘나’를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느끼게 되어 가슴 저린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 교회의 꿈이기에 그러합니다.

솔직히 하바쿡 예언자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답변은 그지없이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그럼에도 하바쿡에게는 경악할 만한 폭탄선언의 위력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이토록 부르짖는데도 모른 척하시는 것인지, 이렇게 엉망이 된 세상을 보고만 있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제 곧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잔혹한 이방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를 들려주고 계시니까요. 이러한 하느님의 응답은 하바쿡의 마음을 혼란하게 했을 법한데요. 수천 년을 이어서 똑같은 말씀을 들려주고 계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지 헤아려보게 됩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답답하고 한심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위해서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라고 야무지게 따지는 믿음인이 보고 싶다는 고백이 아닐까요? 우리의 기도가 하바쿡 예언자처럼 대범하고 똑 부러지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늘 세상은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반대로만 굴러가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오직 나의 안녕과 나의 건강을 염려하며 빌고 또 비는 기도로 채워지고 있으니 참으로 송구한 일이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신 비유 말씀이 색다르게 다가오는데요. 마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상전이고 우리는 하잘것없는 종에 불과하다는 말씀으로 들을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주인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 충실한 종에게 “쓸모없는 종”이라는 고백을 단언하시는 것으로 오해하실까 염려가 되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날 예수님의 말씀이 그 시대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결단코 주님께서는 당신과 우리 사이가 주인과 종이라 단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천년 전에 들려주신 그 케케묵은 비유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일러 주시려는 것인지 다시 살펴야겠지요.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만 줄 수 있고 성장시킬 수 있는 신비의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작고 큰 것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믿음의 양이 아니라 비워내고 비켜드림으로 작아지는 작업이며 그 작아짐 안에 그분의 것을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 믿음의 근거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얻은 구원의 은혜에 있습니다. 때문에 그분께서는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을 넘어 우리 믿음이 매일 ‘자라나도록’ 살펴 키워주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단순해야 합니다. 단순함이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천국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기에 그렇습니다. 이 단순함이야말로 그분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 성실한 종이 될 수 있는 천국의 묘약인 까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바쿡 예언자의 모습은 우리에게 더더욱 믿음의 귀감이라 싶은데요. 막막한 삶이 힘에 겨워서 주님께 하소연하며 매달릴 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응답은 주님을 향한 환호로 마감된다는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으니까요.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아내도록 철저히 학습 시켜 주니까요. 하바쿡 예언자처럼 살아간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라는 바오로 사도의 당부를 온전히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니까요. 마침내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간다는 진리에 입각하여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참된 신앙인으로 도약하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사제는 마음이 아립니다. 많은 신자분들이 여태껏, 전쟁터에 계약의 궤를 모셔오면 전투에서 승리할 줄 알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잘못 이해한’ 신앙을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믿음과 말씀을 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드는 모습이 비일비재하니 말입니다. 이야말로 하느님께 어떻게 하실지를 일러드리려는 같잖은 행위이니 말입니다. 그분의 뜻을 좌지우지하려는 오만일 뿐이니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신앙생활의 규칙에만 매달려 지낸다면 결국 예수님이 아닌 율법을 더 숭배하는 꼴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그분의 뜻에 전혀 엇박자만 치고 있다면 그분과 전혀 상관없는 미신행위입니다. 믿음의 오용이며 하느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결국에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처럼 ‘상대의 기를 꺾어 버리는 아주 나쁜 짓’으로 발전할 소지가 큽니다. 끝내 주님께로부터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다는 엄중한 경고를 들을 것입니다.

신자들이 주님을 잊고 주님 사랑을 잃는다면 교회는 허기져 쓰러질 것이 뻔합니다. 신자들을 통해서 주님의 뜻이 행해지지 않는 교회는 생명을 잃어 빈사상태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와 똑같이 예수님을 직접 보지도 못했고 만난 적도 없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철저히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얼마든지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과의 온전한 사랑을 완벽하게 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전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물으십니다. 신앙생활을 성당 안에서만 살아내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십니다. 믿음의 정신은 ‘언제 어디에서나’ 그분의 뜻을 살아내는 삶의 변화에 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십니다.

한 주간, 성당에서만 사랑의 허울을 쓰고 있다가 세상에서는 훌러덩 벗어던지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의 삶을 살피기 바랍니다. 스스로에게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묻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만약에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겠다면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하바쿡 예언자처럼 주님께 탁 터놓고 여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오늘의 화답송으로 해답을 콕 찍어 일러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원합니다. “마음을 무디게 하지마라”는 말씀은 곧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고대하고 계신다는 고백임을 깊이 새겨 살아주시길 바랍니다.

하여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큰일을 하시도록 마음을 비워드리는 복된 한 주간이시길 기도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9-09-30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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