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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물유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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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유본말, 사유종시(物有本末,事有終始). 신경써야 할 것에는 근본이 되는 것과 말단이 되는 것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마침이 있다.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시대, 맹자가 활동하던 그 때 유행하던 사상 조류가 둘 있었다. 하나는 양주라고 하는 도가(道家)의 극단적 이기주의적 말류(末流)와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묵가 사상이다.

양주 측에서는 설사 자신의 정강이 털 하나를 뽑아 세상을 구제한다 해도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것이 나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심보다. 극도의 이기주의로서 자신의 안위가 최대 목적이다. 그에 반해 묵가 계열은 발꿈치로부터 정수리까지 모두 갈아서라도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주의다. 겸애설로 유명한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자 했다.

그런데 맹자는 이 둘을 극도로 싫어했다. 양주를 미워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묵가를 미워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맹자는 양주보다는 묵가를 더욱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이 더 심하다고 여긴 탓이다. 맹자는 묵가가 부모를 버렸다고 여겼다.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하고 섬겨야 할 사람(本)을 버린 사람이 어떻게 관계가 멀리 있는 사람(末)을 극진히 섬길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유가에서 효를 강조하는 이유다. 효는 일반적으로 부모가 베푼 사랑에 대한 자녀의 보답으로 이해되지만 또 한편으로 효는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다. 더 널리 사랑을 베풀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가까이 있는 부모에 대한 태도를 통하는 것이다. 자식이 더 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효에 대한 강조인 것이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효는 본(本)이지만 부모의 마음은 자식의 평천하(平天下)라는 큰 목적(末)을 지향하고 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전교 주일이다.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는 신앙생활의 최종 귀착지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신앙이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가를 점검하지 않으면서 이뤄지는, 본말이 전도된 전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근본이 서지 않는다면 전교를 통해 새로 신앙인이 되는 숫자가 증가하는 만큼 사라져 가는 신자의 수도 그에 상응할 것이다. 그래서 전교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역으로 근본을 잘 지키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전교란 누군가를 계몽시키는 따위의 수혜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나 자신이 복음화되는 행위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전교는 일종의 압박과 무거움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그 말씀은 우선 나에게 내려진 복음에 대한 진지한 묵상을 전제로 한다. 모든 민족으로 멀리 전파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 나와 맺어진 가장 가까운 곳에서의 기쁨이며 전달받는 이도 자신의 삶 안에서의 구체적 기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 끝까지라는 말이 주는 압박으로 인해 가장 가까운 곳에서의 기쁨보다는 저 멀리라는 위압감에 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멀리라는 말은 거리상의 개념이 아니고 나의 기쁨이 확산될 수 있는 가능 범위를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야곱의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4-5)고 말한다. 이사야의 이 환시는 종말론적 희망을 가진 고백이다.

이사야는 야만적인 폭력과 탐욕으로 점철된 세속적 심판이 아닌 칼과 창을 보습과 낫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랑과 용서의 심판을 기다린다. 모든 민족들이 주님 앞으로 모여드는 것은 한 사람의 외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의 희망이 한 사람에 의해 각성되고 선포되는 것일 뿐이다. 만민의 구원은 익명의 만민이 아니라 만민 각자에 해당되는 ‘나의’ 구원이다. 그리고 ‘나의’ 구원은 ‘너의’ 구원을 전제로 가능한 일이다. 만민은 각각의 나와 너가 합쳐진 말이지 지정되지 않은 이념적 숫자가 아니다. 이사야의 ‘야곱의 집안아,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는 독려는 종말적 구원의 때를 위한 너와 나의 결심과 각오에서 시작됨을 알린다.

그래서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오늘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모시겠다는 말과 같다. 누군가를 주인으로 섬길 때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폭력이나 계약으로 인한 피동적 노예 생활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삶에 대한 희망을 당신에게 오로지 맡긴다는 봉헌으로서의 삶이다. 우리는 모두 후자에 속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분의 통치에 나를 내맡긴다는 것이고, 모든 것을 당신 명령대로 하겠다는 자발적 고백이다. ‘이제 나는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고 당신이 원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라는 결심인 것이다.

또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은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세상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겠다는 하나의 실존적 결단이다. 그런 이에게만,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에게만 이미 부활하신 그분이 나에게서 되살아 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분의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기쁜 선택이다. 바오로 사도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점은 전하는 이의 발걸음이 아름다울 정도로 기쁜 발걸음(로마 10,15)이라는 사실이다. 맹자가 하늘 뜻에 근본한 사람은 얼굴이 빛나고 등에서도 가득 넘치며(?於背) 온몸에서 그것이 드러난다는 것도 같은 말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 모든 이를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당신께서 알려주신 것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신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중에는 그분의 부활을 의심한 이들도 있었다. 열한 제자. 예수님을 지근거리에서 보았던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여전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의심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보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것이다. 복음 선포에 앞서 더러는 의심하고 더러는 무기력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에 대한 믿음과 그에 따른 결심으로 인한 기쁨이 우리의 얼굴과 등과 사체(四體)에 가득 차는 것이 우선 아닐까? ‘만민’이라는 숫자에 구속되지 않기를,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그 기쁨이 확인되기를 전교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다시금 희망해 본다.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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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10-15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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