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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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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하느님이 소외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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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는 역사의 법칙 하나가 있습니다. ‘내용’이 없을 때 지나치게 ‘형식’에 매달리게 되고, 규율과 전통에 과잉 충성할수록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잔인하고 가혹한 사회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고발, 단죄, 보복…. 필요한 용기일 수 있지만, 때로는 자신만이 정직하고 올바르기에 타인을 단죄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시작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도덕규범이라 하더라도 혹독한 억압과 권위적 체제로 서로간의 불안을 조성하고, 그런 공포 속에 모두가 불행해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 맹목적 충성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도덕과 규범 준수에만 도취되어 자신을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자평하던 바리사이와 비록 떳떳한 삶을 살지는 못하지만 삶의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던 세리의 이야기가 이번 주에 선포되는 기쁜 소식입니다.


■ 복음의 맥락

복음의 본문은 기도에 대한 좋은 예와 나쁜 예의 명백한 대조를 통해 무엇이 진정한 기도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장소적 배경에 대한 것인데 “두 사람이 기도하러”(루카 18,10) 올라간 예루살렘 성전은 해질 무렵 유다인들이 함께 모여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사이와 세리가 보여준 상반된 모습은 그들이 유다 공동체와 맺고 있던 관계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유다 사회 안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특권층이었고 세리는 공동체로부터 그 어떤 존중과 인정도 받지 못하던 이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11절) 곧 공동체를 구분하여, 타인은 그저 ‘나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 불의를 저지르는 자, 간음하는 자, 세리’로 간주합니다. 그가 공동체와 자기 자신 사이에 두었던 철저한 구분은 하느님께도 그대로 적용되어 그의 기도 안에는 하느님이 차단되고 배제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공동체의 비난과 혐오에도 불구하고 그 처참함을 오히려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는 기회로 만듭니다. 아무리 공동체가 그를 고립시켜도 그들을 떠나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공동기도 시간에 참석하며 하느님과도 멀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리사이와 세리가 대조적으로 보여준 ‘하느님과의 관계맺음’을 성경은 ‘의로움’이라고 하며, 이 ‘의로움’이 오늘 복음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주제입니다. 본문의 핵심이 ‘의로움’과 관련되어 있음은 시작과 마무리를 통해서도 파악됩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던(9절)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한다고 밝히시며 시작하시고, 마지막에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4절)고 하심으로써 의로움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규범과 도덕적 원칙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에게, 구원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의로움)를 통해 이루어짐을 분명히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 의롭게 되다

바리사이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보다 자기를 더 믿던 사람이었고 스스로의 영광에만 집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그토록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던 이유는 율법의 모든 규정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2절 참조) 반대로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있었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은, 인간을 ‘의롭게’ 하는 올바른 기도의 결정적 단서가 ‘기도의 주체와 주도권’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온전히 ‘나’를 향하고 있어서(“제가 다른 사람들과 … 같지 않고,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 저는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11절) 이야기합니다. 그의 기도는 그저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우월한 종교행위를 과시하는 의미 없는 나열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세리의 기도는 짧은 분량으로 되어 있고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요구도 없으며 그저 자비를 청하는 것으로만 되어 있지만 오로지 하느님께로 방향 지어져 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3절) 여기에서 ‘불쌍히 여겨’ 달라는 표현은 “자비를 베푸소서!”와는 다른 어휘가 적용됩니다. ‘자비를 베풀다’라는 표현에는 일반적으로 그리스어 ‘엘레이손’이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그리스어 ‘힐라스테티’가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덮어주다, 가려주다, 감추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힐라스코마이’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구약의 ‘계약의 궤’의 뚜껑인 속죄판을 그리스어로 ‘힐라스테리온’이라고 하는 데에서 드러나듯이 ‘속죄’와 연결됩니다. 자신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속죄를 간절히 갈구하던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13절) 못하지만 사실은 정확하게 그리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 하느님께로 향하기

복음에서 세리가 보여주었던 올바른 기도의 모습은 제1독서에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는 받아들여지고 그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 …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집회 35,20-21)합니다.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짓눌린 이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불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달려야 할 길

제2독서의 바오로는 탁월했던 바리사이였던 만큼, 복음의 바리사이 못지않게 철저히 종교적 행위에 충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회개한 후, “주님께서 …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18절 ㄱ)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종교적 행위와 율법 준수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심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고, 지금까지 바리사이로서 가지고 있던 신념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여정에 아픔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는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다.”(2티모 4,16)고 하면서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아무도 거들어 주지 않는” 상황과 “그러나 주님께서 곁에 계신” 상황은 무엇이 진정한 기도이며 관계인지를 명시적으로 알려줍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그 어떤 감정도 숨기거나 덮을 수 없습니다. 그분과의 관계는 세상의 어느 관계보다도 직접적이고 일차적이며 원초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해주는 기도시간은 오히려 우리의 선과 악, 비열함과 간절함이 그대로 노출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그다지 경건하거나 성스럽지 않은 시간일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기도는, 자신의 죄와 한계, 허술함과 위선, 기묘하게 숨겨온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기에 더없이 거룩하고 경건한 시간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우리의 방황과 혼란, 위선과 불안을 있는 그대로, 하나도 거부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비추시고 치유하시는 구원의 은총이며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거룩함에 도달하기 위한 자기실현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믿기에, 있는 그대로, 의심 없이 다가서는 사랑이며 그 관계적 과정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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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10-22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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