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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9) 10세기 ② - 클뤼니 수도원과 개혁 운동

귀족 아들의 죽음, 수도원 개혁의 밑거름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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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뤼니 수도원 2대 원장 오도.



중세 서방 교회를 대표하는 수도원은 오랫동안 귀족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비정상적으로 운영되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개혁의 기회를 잡지 못하던 수도자들은 10세기 초 개혁 성향을 지닌 수도원을 설립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부응하는 신심 깊은 귀족들의 도움으로 개혁 운동이 뿌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클뤼니(Cluny) 수도원이 이 시기에 개혁 운동을 이끌었던 가장 대표적인 곳이었으며, 향후 200여 년 간 유럽 각지의 수도원들은 클뤼니 개혁(Cluniac Reform)에 동참했습니다.



기욤 공작의 클뤼니 수도원 설립 지원

클뤼니 개혁이 가시적으로 시작된 것은 경건공(敬虔公)이라 불린 아키텐(Aquitaine)의 기욤 1세(Guillaume I, 875~918) 공작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베르뉴(Auvergne)의 백작 아들로 태어났던 기욤은 부친이 사망하자 886년부터 오베르뉴의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으며, 893년부터 새로 정복한 아키텐의 공작이라고 스스로 선포했습니다. 이후 기욤은 서프랑크 왕국뿐 아니라 동프랑크 왕국에 속한 몇몇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장했습니다.

기욤은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두었으나 아들이 먼저 사망하자, 직위와 재산을 물려줄 후사가 없다는 것에 크게 실망한 나머지 신앙생활에 눈을 돌렸습니다. 기욤은 자신과 가족들의 내세 구원을 위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수도원 설립을 계획했습니다. 910년 기욤은 그의 영향 아래에 있던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클뤼니(Cluny)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에게 수도원을 봉헌했으며,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를 엄수하도록 권고했습니다.

기욤은 수도원 설립자가 수도원을 소유하고 운영하던 당시 관례를 깨고, 설립자의 모든 권리를 포기했으며 수도자에게 수도원의 운영을 맡겼습니다. 즉, 수도자들이 직접 원장을 선출하게 했고 세속 권력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면책 특권을 보장했습니다. 또한 기욤은 클뤼니 수도원을 교황이 직접 책임지고 보호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초대 원장 베르노의 클뤼니 수도원 개혁

클뤼니 수도원의 첫 번째 원장은 베르노(Berno, 850쯤~927)였습니다. 부르고뉴 지방 부유한 가문 출신인 베르노는 오툉(Autun)에 베네딕도회 성 마르티노 대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886년 베르노는 봄(Baume) 대수도원으로 옮겼으며, 그곳 원장이 되어 전통 수도 생활을 복원하는 수도원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890년 베르노는 지니(Gigny)에 성 베드로 수도원을 자력으로 설립하고 원장을 겸직하면서 개혁 의지를 이어갔습니다. 특히 베르노는 두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에게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Benedictus Anianensis, 750쯤~821)의 수도 규칙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894년 로마를 방문했던 베르노는 이 수도원의 개혁 정신을 교황 포르모수스(Formosus, 재임 891~896)로부터 승인받았습니다.

기욤은 909년 이미 두 개혁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베르노에게 클뤼니 지역을 공식적으로 이양하고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910년 수도원을 설립한 베르노는 브장송(Besanon) 교구장의 승인으로 원장이 돼 봄과 지니 수도원에서 선발한 수도자들과 함께 아니아네의 베네딕투스의 수도 규칙을 따르며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베르노는 3개의 수도원 원장이 되었으며, 수도원 연합의 총장 개념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 교황 세르기우스 3세(Sergius PP. III, 재임 904~911)가 수도원을 교황 직속으로 하는 편제로 받아들임으로써, 향후 수도원이 지역 주교나 세속 권력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이후에도 베르노는 다른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6개의 수도원을 직접 운영했습니다. 925년 베르노는 2명의 제자들에게 수도원을 3개씩 나누어 주었는데, 그중에 오도(Odo, 879~942)가 클뤼니 수도원을 맡아 수도원 개혁 운동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2대 원장 오도에 의한 유럽 전역으로 개혁 운동의 확산

아키텐 영주의 아들로 태어난 오도는 아이의 안전을 기원했던 부친에 의해 유년 시절에 성 마르티노에게 봉헌되었습니다. 오도는 10대에 세속적인 성공을 바라며 기욤 공작의 집에서 경력을 쌓았으나 깊이 실망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투르에 있는 성 마르티노 수도원에 입회해 참사위원으로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파리 유학 시절 오도는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를 처음 접하고 감명을 받은 후, 909년쯤 봄 수도원으로 옮겨 입회했습니다. 베르노가 클뤼니에 수도원을 설립하러 떠날 무렵에 오도는 봄 수도원에 남아 수도원 학교 교장을 맡았습니다. 오도는 베르노 말년에야 비로소 클뤼니 수도원에서 생활했습니다.

927년 베르노가 사망하자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오도를 2대 원장으로 선출했습니다. 오도에게서 클뤼니 수도원을 빼앗으려는 시도가 잠시 있었으나, 교황 요한 10세(Ioannes PP. X, 재임 914~928)는 오도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오도는 교황권과 세속권 지원 아래 클뤼니 수도원이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를 잘 준수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수도원들은 여전히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를 변경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931년 교황 요한 11세(Ioannes PP. XI, 재임 931~935)는 오도에게 다른 수도회들을 감독하고 다른 수도자들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따라서 아직 개혁에 참여하지 않았던 수도회들과 수도자들이 클뤼니 수도원 개혁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여러 지역의 군주들이 오도에게 자신의 영토에 있는 수도원을 개혁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최종적으로 오도는 이탈리아에 있는 수도원 개혁에까지 관여했습니다.

오도는 수도자들에게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서를 엄격하게 준수하기 위해서 침묵과 고행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수도자가 침묵하지 않는다면 선행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수도자는 고행을 실천할 때 그리스도의 신비에 더욱 가깝게 나아갈 수 있고 관상의 깊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도는 수도자들이 기도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한 방법으로 전례를 강조했습니다. 이후 클뤼니 수도원은 음악과 함께 하는 다양하고 장엄한 전례 예식을 발전시켰습니다.



클뤼니 개혁은 연이은 수도원 원장들의 노력 덕분에 100년이 채 되기도 전에 유럽 전역에서 300여 개 수도원들이 개혁 운동에 동참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수도자들이 수도자답게 살 수 있게 됨으로써 수도원은 서방 교회가 영성적으로 지탱할 자양분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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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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