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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루가 1 39~45) - ‘엘리사벳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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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행동주의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강화라는 요인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강화에는 상이나 칭찬 격려 등의 정적 강화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싫어하는 일을 면하게 해주는(예를 들면 착한 일을 한 한 아이에게 설거지를 면해주는 것) 부적 강화 그리고 우리가 흔히 부적강화와 혼동하기 쉬운 벌이나 처벌이라는 형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인간의 바람직한 행동을 조성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적 강화라는 점과 교육현장에서 흔히 사용되는 꾸중과 벌 등은 이상적인 어떤 행동을 유도하는데는 별다른 효과가 없고 다만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수동적인 효과만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바람직한 행동 유도를 위해서는 벌과 꾸중이라는 형태보다는 이유 있는 칭찬과 격려가 더 바람직한 요인이 된다는 점과 이러한 사실은 우리 삶의 전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진리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엘리사벳의 잉태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의미를 이해할 때만이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유와 더불어 오늘 복음이 주는 또 다른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 사건. 한마디로 이 사건의 의미는 「증표」입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자 마리아는 내가 처녀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할 때 천사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증거로써 보여준 것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사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란 신앙의 가장 위대한 응답을 하게 됩니다만 그러나 성모님은 위대한 신앙인이기에 앞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영웅적인 순명 이후에도 여전히 의심과 불안이라는 양가감정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과연 내가 잘한 일일까? 그리고 천사의 말 처녀가 아이를 낳고 내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약혼자 요셉이 믿어줄 것인가? 등등을 반문하면서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겼을 것이다.
아마 이때 성모님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말은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건은 성모님에 있어서는 흔들리는 신앙을 지지해 줄 유일한 증거요 어쩌면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줄 토대가 바로 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유다 산골의 한 동네 에인카림이라고 알려진 곳 오늘날 버스로도 세 시간정도 걸리는 머나먼 거리를 가련한 여인의 몸으로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러한 긴박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성모님은 이 사건을 통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오늘 복음에 이어 유명한 마리아의 노래가 나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추측하자면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기 이전에는 의심하고 흔들리고 증거를 찾고자 하는 신앙이었는데 오늘 복음 이후의 성모님은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으로 변모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모님은 의심의 증거를 찾고자 하는 미숙한 신앙에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으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성서는 그 이유를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란 말씀 때문이었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루가 1 45~46). 흔들리던 성모님의 신앙이 확신의 신앙으로 변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성모님을 격려하고 지지한 엘리사벳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을 통해 아무런 격려와 위로 그리고 확신을 얻지 못했다면 어쩌면 성모님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이해받고 격려 받을 때만이 좀 더 쉽게 자신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결론을 말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모님처럼 위대한 신앙의 응답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엘리사벳 삶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자는 것이지요.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뜻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칭찬이나 격려를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그러한 삶도 바로 오늘 복음의 엘리사벳의 모습처럼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홍금표 신부〈원주교구 삼척종합복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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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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