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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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63) 하느님 뜻과의 조화 (27)

피하지 말고 주님이 주신 영감에 따라 살기/ 세상의 벽은 머리나 정신 아닌 ‘영’으로 허물어/ 이웃 위한 배려처럼 영은 삶 속에 살아 숨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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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프랑스의 위대한 실존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는 자신의 저서 「구토」(嘔吐, La Nausee)에서 세상이 모두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하느님의 존재를 거부했던 그에게는 세상이 온통 넘어설 수 없는 벽이었다.

실제로 우리도 이러한 벽을 일상에서 수없이 만난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가 도착했는데,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누구에게 돈을 빌려서 버스를 탈 것인가. 이때 세상은 막막한 벽이다. 이러한 상황에 나는 얼마 되지 않는 버스비가 없어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세상에 홀로 갇힌다.

아파트의 수많은 주민들과 함께 살아도, 내 주변에는 온통 벽뿐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구토’를 하고 싶은 심정을 느꼈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경외가 넘치는, 아름답고 조화로운 섭리의 장이 아니라 단지 구토를 유발하는 장소였을 뿐이다.

실제로 정신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은 모순 덩어리이고, 심지어 구토를 유발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넘치는 곳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이런 벽을 허물려면 머리나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머리로 자꾸 자기 주장만 하다 보면 벽의 층이 더욱 두터워질 뿐이다. 오히려 벽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철근 콘크리트를 더 쌓는 것이 될 수 있다.

정신의 힘이 아닌 영의 힘이 필요하다. 영은 어떤 벽도 허물 수 있다.

영이 과연 무엇일까. 떡을 만들면 이웃집에 먼저 선물하는 것이 영이다. 이때 이웃에게 주는 떡은 영떡이다. 이웃집 아이가 우리 집 마당에 와서 대변을 보면, 우는 아이를 달래서 아이의 집에 친절하게 데려다 주는 것이 영이다. 폭설이 내렸을 때, 성당을 찾는 신앙인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성당 문 앞을 청소하는 것도 영의 생활이다.

영의 생활은 쉽다. 어렵지 않다. 놀고 싶고, 술 마시고 싶고, 잡담하고 싶고, 텔레비전 보고 싶은 그 시간을 쪼개서 성경을 읽고, 영적인 책을 읽는 것이 바로 영의 생활이다. 물론 영의 차원은 무한하기 때문에 은하계 너머 별나라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영을 딴 나라에서 찾아선 안 된다. 영은 멀리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영은 우리 바로 옆에서 숨 쉬며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인 우리는 보다 확실하고 명확하게 접할 수 있는 영을 이야기해야 한다.

오늘 저녁 식사준비를 걱정하는 주부가 있을 것이다. 그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 영성생활이다. 밤 11시경 혹은 적절한 시간에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도 영성 생활이다.

안 자는 것이 문제다. 잠을 자지 않는 것은 영성 생활이 아니다. 고민이 있더라도 복잡한 문제는 영의 창고인 하느님께 맡기고 잠을 잘 자야 한다. 그렇게 잠을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하느님은 선물 하나를 머리맡에 놓아두실 것이다.

이러한 생활 속 영을 발견해야 한다. 그 때그때 상황에 따라 나를 인도해 주시는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합치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매사 고분고분하게 처신하라는 것이 아니다.

영성 생활의 또 다른 면은 ‘도전’이다. 난처한 순간을 피하고, 어려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영이 아니다. 사실 좋지 않은 상황은 피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방어기제가 인간에게는 누구나 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

피하지 말고 공명(하느님 뜻에 조화되는 삶) 안에서 직면하면 하느님이 영감을 주신다. 그 영감대로 살아가면 된다.

답은 항상 가려져 있다. 답은 깜깜하고 어둡다. 지금 1시간 뒤에 전 세계에서 어떤 엄청난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모른다. 깜깜하다. 내일 중국에서, 내일 제주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영성 생활은 깜깜한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내일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다. 내일은 깜깜한 상태로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공명의 삶이 깨어있는 삶이다.

공명의 삶을 살아간다면 당장 어떤 일이 벌어져도 어려움을 풀어나갈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어려움을 피할 이유도 없다. 피할 것이 하나도 없다.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면 일주일 뒤에 혹은 한 달 뒤에 해결하면 된다. 여유 있게 하면 된다. 죽음의 문제가 다가와도 별것 아니다. 예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마태 6,25)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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