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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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66) 하느님 뜻과의 조화 (30) 인간의 시간·공간이 주님 위한 것 되게 하는 공명

‘지금 이 순간’은 유일무이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 주님 뜻과 조화되도록 미리 형성한 섭리 따라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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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유일무이한 존재다.”

여기서 유일무이하다는 말을 좀 더 깊게 묵상해 보면 참으로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우선 유일무이한 인간은 항상 유일무이한 시간에 놓였다. 지금 이 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딱 한 번만 온다. 어제 아침과 오늘 아침이 다르다. 어제의 미사와 오늘의 미사가 다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유일무이하게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또한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공간도 유일무이하다. 우리는 늘 비슷한 공간에 머무는 것 같지만 어제의 식탁과 오늘의 식탁이 다르다. 어제 기도했던 성당과 오늘의 성당이 다르다. 이렇게 유일무이한 인간은 늘 유일무이한 시간과 공간을 스치듯 흘려보내고 있다. 우리는 늘 하느님이 허락하신 단 한 번의 상황의 연속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일무이한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저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허투루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침이면 아침 식사하고, 점심이면 점심 식사하고, 저녁이면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일무이한 시간과 공간을 형성의 시간과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느님이 당신 뜻과 조화되도록 미리 형성하신 그 섭리를 따라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신비를 부담스럽게 느낄 수 있다. “그저 그렇게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면 되지 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어렵게 따라야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비를 두렵거나, 부담스럽게 느낄 필요가 없다. 힘들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이다. 조금만 신경을 기울이다보면 그 해결 열쇠는 하느님이 주신다. 당장 인간적으로 하느님 신비를 따른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늘 당신을 따르고 싶어하는 영감과 지혜, 새로운 방법론을 주신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인생을 똑바로 보고,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다. 그 속에 참 행복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복팔단의 행복도 바로 이러한 맥락의 중심에 있다.

이러한 참 행복의 삶을 위해선, 그동안 끊임없이 말해 왔지만 순명적 합치와 연민과 융화, 역량이 중요하다. 하느님께 합치하고 이웃을 연민으로 대하고, 창조된 세상과 융화하고 그래서 하느님이 주신 인간의 참 역량을 발휘해 정진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은 처음에는 수동적인 것이지만 나중에는 능동적으로 변한다. 우리의 아이들을 보라. 처음에는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의 지도에 수동적으로 따르지만 성인이 되면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게 된다. 예비신자들이 처음에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수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만 나중에는 능동적으로 하느님을 갈망하고 하느님의 대전으로 걸어 나가게 된다. 시켜서 수동적으로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수동적인 것 자체가 주관하시는 분에게는 기쁨을 드릴 수 있다.

신앙의 길에도 사춘기가 있다. 하느님과 합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비신자 단계에서는 처음에는 고분고분하게 하느님과 합치하려 노력한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스스로 어떤 경지에 오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고 이웃을 비판할 때가 있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러한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 다음에 오는 단계가 수동적 단계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능동적으로 하느님을 따르지 않아도 하느님이 저절로 나에게 오신다. 그렇게 오시는 하느님은 참으로 충만해서, 능동적으로 따를 때의 하느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찬란하다.

하느님 뜻과 조화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몇 가지 하느님 뜻을 따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전인격적으로 변화돼야 한다. 그 변화를 구체적으로 말하라면 수없는 성향들을 들 수 있다. 신앙에 대한 확고함의 성향이 그렇고, 인내, 부드러움, 효과성, 개방성, 순명, 꾸준함, 신실함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이 완성될 때 하느님 뜻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도 가능하다. 하느님 뜻과 조화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확고함, 인내, 부드러움, 개방성, 순명, 꾸준함, 신실함의 성향을 획득할 수 있다. 이래서 신앙을 신비롭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하느님의 신비를 완전히 체득하고, 참 행복에 접근하기 위해선 공명(하느님 뜻과의 조화)에 주목해야 한다. 공명이 획득되면 우리의 유일무이한 시간과 공간은 하느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 된다. 참으로 충만하게 된다. 공명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간다면 유일무이한 시간과 공간을 허투루 보내게 되고, 그 셈을 나중에 해야 한다.

공명의 상태에 있으면 이 세상 전체가 하느님 현존의 장으로 보인다. 동서남북 전체에 가득한 하느님의 현존을 볼 수 있다. 감실, 제대, 십자가, 들판에 핀 꽃, 글을 쓰기 위해 전원을 켠 노트북, 식사를 하기 위해 집어든 숟가락 등에서 모두 하느님 현존이 보인다. 더 나아가 하느님이 나 자신을 통해 당신을 세상에 드러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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