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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진 신부의 세상살이 신앙살이] (184) 바람을 꼭 닮은 아저씨(2)

삶의 마지막에 남긴 쪽지, 내용은 ‘신부님, 감사합니다’ / 병환 중에 ‘침묵 속 웃음’ 보여준 K씨/ 무릎 꿇은 경건한 봉성체 후 세상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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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도 노랗게 피고, 백합도 꽃봉오리를 터트려 세상이 온통 밝게 변한 유난히 ‘봄’스러운 날이었습니다. 내 마음도 어디론가 봄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싶은 그런 한량이 되고 싶은 날, 마음을 잘 추슬러 그 병원으로 가서 환우들과 정성스레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봉성체 가방을 들고 원목실 수녀님과 전 병동 환우들에게 봉성체를 해 드리러 갔습니다.

그리고 7층이 되자, 늘 그렇듯 K 형제님이 생각났습니다. 그 형제님이 계신 병실로 우선 갔더니 여전히 형제님은 침상 위에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초췌한 얼굴과 무척 힘들어하는 표정으로 마른 기침까지 하셨습니다. 순간 걱정이 들어 다가가 등을 쓰다듬고 손을 잡으며 인사드렸습니다.

“형제님, 저 왔어요! 어휴, 날씨가 이제 봄이 다 되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조금 힘들어 보이네요. 어디 불편하신 곳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그리고 오늘은 그냥 편히 누우셔요!”

하지만 형제님은 극구 괜찮다는 손짓과 함께 침상에 무릎을 꿇고 병자 영성체를 하셨습니다. 성체를 삼킬 수 없는 듯한 모습인 것 같아 탁자 위에 있는 물컵을 빨대와 함께 입에 물려 드렸더니 성체를 간신히 삼키셨습니다. 그리고 옆으로 누우시더니 모은 두 손을 펴시어 호주머니에서 꾸깃꾸깃 쪽지를 꺼내시고는 보여주셨습니다.

‘신부님, 말을 못해서 죄송해요. 그리고 늘 감사합니다.’

비뚤비뚤한 글자가 어찌나 정겨운 지…. 애써 웃음을 지어보여 주시기에 저는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 말씀드렸습니다.

“에이, 요새 말 많은 사람들보다 우리 형제님 침묵이 이 세상에 큰 울림이 돼요. 저도 그 침묵의 삶, 닮고 싶어요. 헤헤.”

그랬더니 감은 눈 그대로 방그레 웃으셨습니다. 다시 한 번, 그 분의 손을 꼬옥 잡아 드린 다음, 그 병실을 나와 다른 분들께 봉성체를 해드리고 수도원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달 다시 병원에 갔더니 담당 수녀님께서는 형제님이 마지막 봉성체를 하신 후, 그 다음 날 오전에 임종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아…, 그러면 그 쪽지가!’

그랬습니다. 바로 그 쪽지가 그 형제님이 제게 남겨주신 마지막 유언이었던 것입니다. K 형제님은 그렇게 가셨습니다. 제 마음 속에 ‘침묵의 자유로움’을 가르쳐 주고는 그해 봄바람을 타고, 차가우면서도 시원한 그 봄바람으로 왔다가, 생명있는 것들을 보듬어주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그 곳으로 먼저 가셨습니다. 당신 생의 모든 고통을 ‘침묵 속에 배인 웃음’으로 받아 안고서 말입니다.

16년이 지난, 이 봄! 또 다시 제 곁으로 차가운 바람이 한 줌 붑니다. 머리가 맑아집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 바람 속에 어떤 것에도 머물지 않았던 ‘바람 같은 삶’을 사신 K 형제님의 맑은 숨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침묵’과 ‘자유로움’, ‘머물지 않음’과 ‘바람 닮은 삶’이 어떠한 삶인지를 오늘도 생각하게 됩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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