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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27) 성 암브로시우스 ③

순교자 공경하며 소외된 백성 위해 헌신, 하느님 섭리 따라 살며 합치의 신비 깨닫고 확고함과 완벽한 신앙으로 교회의 품위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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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우스는 주교직에 오른 후, 본격적인 내면형성에 전념한다. 내면 형성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당신의 뜻대로 형성될 수 있도록 마련하신 섭리를 깨닫고 수련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다양하다. 성경 공부와 순교자들에 대한 공부도 여기에 속한다. 기도생활, 묵상생활은 물론이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이제 이 모든 일에 전념하며 스스로의 형성을 위해 노력한다. 특히 순교자들에 대한 신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순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내면형성은 내면 형성 그 자체로 그쳐선 안 된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인간관계의 상호형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내면형성이 나와 이웃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서로에게 형성을 시켜주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완벽한 내면형성은 완벽한 상호형성으로 저절로 이어진다. 상호형성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내면 형성 또한 안됐다고 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이제 감옥에 갇힌 죄인 등 소외된 백성들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이 시점에 만난 분이 바로 모니카와 그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다. 당시 이단에 빠졌지만 뛰어난 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를 만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신앙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회개하고 하느님의 종이 된다.

교만했던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시킨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거룩한 사람이었다. 거룩함만이 교만을 물리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순교자들에게 푹 빠진 그가 죽음을 두려워 하겠는가. 그에게는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제까지도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가장 행복한 것은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안에서 살 때다. 거리에 보니 행복 예식장이 있다. 행복예식장에서 결혼한다고 해서 행복해 지는가. 아니다. 쓰러져 가는 성당이라도, 성당에서 결혼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결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정한 행복은 교회의 성사 안에 있다. 황제는 성사의 행복을 원했고, 결국 암브로시우스 앞에서 회개하고 행복의 성사를 받게 된다.

암브로시우스가 이처럼 거룩함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성인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분이었다.

물론 이러한 성인의 삶에는 늘 하느님의 섭리가 함께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식을 많이 쌓게 해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했고, 특히 주교가 될 때 어린아이를 통해 당신 뜻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렇게 하느님은 성인을 주교로 이끌었고, 더 나아가 당신과의 합치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다. 기도와 교리공부, 성경공부 등을 바탕으로 수련을 통한 내면 형성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셨다. 합치의 성향은 본질적으로 연민의 성향을 기르는 계기가 된다. 하느님과 합치하면 이웃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 결국 하느님은 암브로시우스 성인의 마음에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키시어 소외된 이웃과 버림받은 이웃을 돌보는 상호형성의 길로 이끌었다. 연민은 또 더 나아가 정의로 연결된다. 이웃을 향한 연민은 이웃이 고통받는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의 확고함이 바로 황제와의 마찰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마찰은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설명하는 첫 사례로 기록됐다.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 그리고 물러서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교회의 품위를 확고함과 완벽한 신앙으로 지켜낸 것이다.

우리가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훌륭하다고 보는 것은 이래서다. 내면형성과 상호형성, 세계 형성의 완벽한 성취와 조화는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의 덕, 분별의 덕, 합치의 덕, 연민의 덕, 사회정의 실현 등이 암브로시우스 성인이 이룬 위대한 모범이다. 물론 모든 것은 섭리다. 인간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서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문제는 이러한 신적신비의 사랑으로 주어지는 은총과 섭리를 우리 각자가 어떻게 개발하고 가꾸어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정영식 신부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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