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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31)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①

정통 신앙 수호에 몸 바친 위대한 교부, 어릴적부터 성직자 꿈꾸며 철학·신학 두루 섭렵, ‘성모님의 신학박사’로 불리며 이단 척결에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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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년.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꼭 기억해둘 필요가 있는 해다. 그해 2월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80?~337)와 리키니우스(Licinius, 270?~325)가 오늘날의 밀라노에서 공동으로 칙령(勅令)을 발표한다. 소위 밀라노 칙령이 그것이다.

이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다. 칙령은 그리스도교인을 포함해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믿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동안 그리스도교에 가해지던 박해를 금지했다. 더 나아가 국가와 개인이 불법적으로 빼앗았던 교회 재산을 모두 반환토록 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개인적으로 공의회 설립을 주도해 교리를 체계화 하는 등 그리스도교를 장려했으며, 교회 설립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로 점차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하지만 세상 일이 늘 그렇듯,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리스도교 성장과 함께 이단도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종교의 자유가 생기자 너도나도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세속 정치 지도자들은 종교인들이 갈라져서 싸우자, 어느 편이 옳은 말을 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혼란이 거듭됐다.

성 치릴로(St. Cyrillus ab Alexandria, 축일 6.27)는 이러한 혼돈의 시기인 370년 북부 아프리카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부터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 치릴로는 철학과 신학 등 이론적 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영신 수련에 대한 열의도 강해, 직접 이집트에 가서 수도자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으며, 예루살렘에서는 요한 주교 아래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후 치릴로는 412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로가 서거하자 그 후임으로 주교직에 올랐다.

이후 그는 정통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헌신한다. 과도한 엄격주의를 표방한 도나투스 이단에 맞섰다. 또 나중에 화해하긴 했지만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연설을 오해, 맞섰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만큼 치릴로의 교회에 대한 사랑, 정통 신앙 수호를 위한 결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치릴로 총대주교는 이교와 이단에 맞서 수많은 글을 썼다. 설교에도 열성이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단연 돋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최대 공적은 네스토리우스 이단을 극복해 낸 것이다.

치릴로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있었을 당시,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일치해 있다는 교리와 다른 이론을 폈다. 그리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 아니라고 했다. 그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이단에 빠졌다. 신자뿐 아니라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혼란을 겪었다.

이에 치릴로는 강론을 통해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리고 이집트 수도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이단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했다. 네스토리우스에게도 직접 편지를 두 차례나 보내, 주장의 철회를 요구했다. 하지만 문제는 진화되지 않고 점점 악화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네스토리우스 이단을 믿는 추종자들이 늘어났다.

이에 치릴로는 교황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교황은 이 문제와 관련한 모든 판단과 전권을 치릴로에게 위임했다. 이에 네스토리우스는 분개했고, 교황이 아닌 로마 황제에게 치릴로를 고소했다. 네스토리우스가 총대주교로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황제가 거주하던 곳이었다. 당연히 네스토리우스는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 문제를 독단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교들의 회의를 소집하는데 이것이 유명한 441년의 에페소 공의회다.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결정했으며, 그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파문될 것임을 결의했다. 그리고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테오토코스)으로 선언했다. 치릴로가 ‘성모 마리아 신학박사’로 일컬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점에서 치릴로는 성모 신학의 정립 소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에도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이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이에 치릴로는 모든 생애를 바쳐 이단 척결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는 그렇게 32년간 총대주교직에 있다가 444년 선종했다. 교황 레오 13세는 치릴로에게 교회박사라는 칭호를 내렸으며, 이후 지금까지 로마 가톨릭 위대한 5인의 교부 중 한 사람으로 공경을 받아 오고 있다.


정영식 신부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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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0-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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