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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50) 성 토마스 모어 ①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책임감과 인품으로 타의 모범 보인 성인, 가톨릭의 휴머니즘적 정의평화 사회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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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St. Thomas More, 축일 6.22)는 이상적 국가상을 그린 명저 ‘유토피아’를 쓴 이로 유명한 영국의 정치가이자 인문주의자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토마스 모어를 순교자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15세기에서 16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인물이다. 로마가 종교를 박해하던 초기 교회 시대도 아닌데 순교를 하다니?

그의 삶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1478년 영국 런던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요구로 법률가가 되려고 링컨 법학원에 재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에 대륙의 르네상스 문화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에라스무스와 친교를 맺었다. 유명한 ‘우신예찬’(愚神禮讚)(1511)도 에라스무스가 토마스 모어의 집에 묵으면서 쓴 것이다. 토마스 모어는 대학 졸업 이후 변호사가 되었고, 의회에도 진출했다. 그는 그렇게 영국사회의 주류였다.

물론 그는 한때 교구 사제나 수도자가 되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지도했던 신부는 그의 길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토마스 모어는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아내 요안나 골드를 맞아 평화로운 가정도 이뤘다. 하지만 부인이 아들과 딸, 둘을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에 토마스 모어는 자녀 양육을 위해 과부인 알리스와 재혼했다.

토마스 모어의 가정은 성가정이었다. 그는 가장으로서 모든 면에 있어 모범이었다. 매일 미사에 참례했으며, 식사 때에도 늘 성경을 읽었다. 타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가 몸에 배어 있어서 손님을 접대할 때는 모든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그런 그는 진정한 이상적인 사회 유토피아를 꿈꿨다. 영국의 사회악을 통렬히 비판하고 이상 사회상을 묘사한 ‘유토피아’는 이렇게 탄생한다. 그러는 동안 그의 명성도 날로 높아갔다.

그의 책임감과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그가 대법원장이었을 때였다. 그는 중대한 사건을 판결할 때마다 일개 판사에 불과한 늙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올바른 판결을 위한 축복을 빌었다고 한다. 백성들은 책임감 강하고 성실한 그를 사랑했다. 영국 국왕 헨리8세도 그를 크게 신임했다. 프랑스와의 화친문제 등 기타 여러 가지 중책을 그에게 맡겼으며, 그때마다 성공적으로 책임을 완수했다. 토마스 모어가 1529년 10월 영국의 재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왕과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한몸에 받는 그는 이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영예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 국왕 헨리 8세가 왕비 캐서린을 버리고 궁녀 앤 불린과 결혼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신자는 이혼을 할 수 없었다. 토마스 모어는 국왕의 이혼을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국왕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토마스 모어는 사직서를 던진다. 국왕이 사직서를 수리할리 만무다. 그는 오히려 토마스 모어를 설득하려고 했다. 국왕은 실제로 이혼을 했고, 자신이 수장이 되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세웠다. 토마스 모어는 루터의 복음주의에 반대하고 가톨릭의 휴머니즘에 의한 평화와 사회정의 실현을 원했다. 이젠 국왕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끊임없이 반대하는 토마스 모어는 이제 불편한 존재였다. 설상가상으로 정치적 정적들도 여러 가지 모략으로 토마스 모어에게 역적의 죄목을 씌웠다. 결국 토마스 모어는 런던탑에 구금됐다. 재산도 몰수 당했다. 그렇게 1년을 살았다. 그 기간 동안 많은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 딸과 부인까지 와서 마음을 돌릴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토마스 모어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눈물로 호소하는 부인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양심을 어겨서 국왕의 비행에 동의하고 그 대가로 형벌을 면한다 합시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동안 더 재미있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 수 있겠소?”

부인이 대답했다. “한 20년쯤….”

“20년쯤? 그래 그것 더 살려고 죽어서 영원한 지옥 불을 당해도 좋단 말이오? 그건 너무나 미련한 짓일 뿐이오.”

1535년 7월 1일에 토마스 모어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형 집행은 6일에 이뤄졌다. 단두대에 선 그가 최후 진술을 했다.

“나는 가톨릭 신앙을 위해 죽는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 그는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이렇게 외쳤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정영식 신부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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