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성서신학을 공부하는 안동교구 신부님이 하루는 좋은 묵상 한 편을 건졌는지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형, 복음에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 있잖아, 그 내용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들어?”라고 물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말했습니다.
“음, 뭐,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에 귀 기울이는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서, ‘기도’와 ‘묵상’의 중요성을 예수님께서 이야기 한 것 아닌가!”
그러자 그 신부님은 웃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형, 나는 그 복음을 읽고 묵상 할 때마다, 지금 현재 내 자신의 삶을 묵상해 보곤 해. ‘지금 나는 주어진 몫을 제대로 선택하고 있는지에 대한 묵상’ 말이야. 사실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를 이중적으로 해석하면, 신앙 안에서 좋은 신앙의 표본과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되어버릴 수 있거든. 하지만 중요한 건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는 옳고, 마르타는 글렀다’라고 말하지 않으셨어. 예수님은 단지 ‘마리아’를 가리키며, ‘지금 좋은 몫’을 택했다고만 하셨거든.”
“그렇지. 예수님께서 ‘좋은 몫을 택했다’고 했지.”
“형, 장면을 구상해 보면,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셔서, 우선적으로 말씀을 선포하셨어. 즉 예수님이 말씀을 선포하실 때에 ‘좋은 몫’이란 말씀을 잘 듣는 것이거든. 말씀을 마치신 후에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지 않았을까? 이때 예수님을 비롯하여 자신의 집에 온 손님이 ‘식사를 잘 할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 또한 ‘좋은 몫’이라 생각해.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좋은 몫’을 선택한 마리아가 식사하시려는 예수님 앞에 앉아 ‘예수님, 좋은 말씀 더 해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어쩌면 그때에는 성심껏 식사 준비를 하는 마르타가 ‘좋은 몫’을 택한 것이라 생각해! ‘좋은 몫’을 택한다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것 같아.”
그날 나는 그 신부님을 통해 ‘좋은 몫에 대한 선택’에 대해서 더불어 함께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부하거나 일할 때 노는 생각’을 하고, ‘놀아야 할 때에는 공부나 일 걱정’을 합니다. ‘미사 강론 때에는 열심히 본당 주보 보고’, ‘미사 끝 부분 공지 사항 시간에 눈 감고 기도’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내가 어디 있나!’를 제대로 보는 눈, ‘좋은 몫 선택’의 필수 조건인 듯 합니다. 또한 ‘좋은 몫’을 선택하는 사람이란 현실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분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현실’을 충실하게 살면서, 자신을 잘 직시하는 사람만이 ‘좋은 몫’을 제대로 잘 선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