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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66) 십자가의 성 요한 (3)

‘능동적 정화의 삶’ 노력해야, 대부분의 편한것들 영혼 망가뜨려, 감각 통해 들어온 나쁜것 우선 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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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내면의 모든 차원들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그러한 고통 속에서 요한은 굳게 일어선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삶을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기도 안에서 그 모든 고통을 이겨냈다. 이후 하느님으로부터의 격려와 은총을 통해 감옥 탈출에 성공한 요한은 맨발의 가르멜 수녀회에 피신할 수 있었다. 그때 요한의 나이 36세였다. 이후 요한은 놀라운 열정으로 책 집필에 나서게 되는데,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도 이렇게 탄생했다.

여기선 차가운 감옥의 2인치(5∼6㎝) 구멍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 줄기에 의지해 집필한 신비 신학의 대작, 「어둔 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내용이 좀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찬찬히 따라 읽다보면 영성의 참 깊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둔 밤」을 보면, 인간 삶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뉜다. 하나는 ‘능동적 정화의 삶’이고 또 다른 하나는 ‘수동적 정화의 삶’이다. 이 중 능동적 정화의 삶과 수동적 정화의 삶은 또다시 ‘감각적 정화’와 ‘영혼의 정화’로 나뉜다.

감각적 정화란 쉽게 말해서 우리가 가진 이 몸뚱어리의 감각에 관한 것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는 것을 말한다. 그 감각을 정화한다는 것이다. 감각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이 감각을 통해서 반형성적인 것들이 즉 잘못된 요소들이 내 안에 많이 들어올 수 있다. 우선 욕심을 들 수 있다. 몸이 편해지기 위해 많이 먹으려고 하고, 돈을 벌려고 하고, 좋은 집에서 살려고 한다. 우리는 감각적으로 편해지기 위해 많은 욕심을 부리고, 그 욕심에 매여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 욕심에 의해 나의 의지는 나쁜 방향으로 움직여 질 수 있다. 감각적으로 나쁜 것이 들어와서 그것이 판단을 잘못 내리게 하고, 잘못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혼 또한 망가지게 된다. 감각의 문제가 영혼의 문제로 확장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감각을 정화함으로써 영혼, 즉 이성 기억 의지 들을 변화시켜야 한다. 참고로 이성의 정화는 신앙 즉 믿음으로 가능하고, 기억의 정화는 희망으로, 의지에 정화는 사랑으로 가능해진다.

앞서서 설명한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영혼의 성’ 원리와 연결시켜 보자면, 감각적 차원에서의 능동적 정화는 1궁방과 2궁방과 관련된 것이고, 영혼 차원에서의 정화는 3궁방 내지 4궁방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벌레와 독충이 들끓는 1궁방에서 벗어나 우리는 2, 3, 4궁방으로 나아가야 한다. 감각적인 요소들을 빼내야 한다. 그래서 좋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 불편하더라도 성경을 많이 읽고,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기 싫어도(감각이 거부하더라도 그 정화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감각이 싫어하는 것들을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감각적으로 편한 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망가트리는 것이다.

영적 초심자는 이렇게 부단한 노력을 통해 감각의 정화를 성취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의 눈과 귀와 입과 손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 변화와 동시에 이성적 차원의 변화가 오고, 동시에 나쁜 것들은 사라진다.

육신이 변화가 되면 그 다음에 육신의 작용의 하나인 이성이 변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기억도 변하고, 의지도 바뀌고, 결과적으로는 행동과 삶 자체도 좋은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1~4궁방까지는 나 자신의 능동적인 힘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능동적 정화의 삶이다. 나 자신의 노력으로 정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5궁방으로 접어들게 되면 지금까지의 능동적 정화의 삶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동적 정화의 삶으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수동적이라는 말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만 이 곳에서는 참으로 거룩한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수동적이라는 말은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게 된다는 의미다. 하느님의 손에 내맡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 자신이 나의 변화를 주도했다면 더 높은 단계에선 하느님께서 직접 나 자신을 변형시켜 주신다. 그 놀라우신 섭리 앞에서 우리는 그저 묵묵히 경외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이 ‘수동적 정화의 삶’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정영식 신부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1-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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