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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1)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적 존재라는 사실 얼마나 신비로운가, 인간 제외한 모든 피조물 영성생활 하지 못해, 태어날 때 받은 영성적인 자질 묵혀두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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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식 신부 (효명고등학교 교장)

이번호부터 정영식 신부의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를 새로이 연재합니다.

이미 지난 2008년 2월부터 2009년 9월까지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를 연재한 바 있는 정 신부의 글은 영성적 삶을 갈망하는 현대인들을 영성의 생활화로 이끄는 초대가 될 것입니다.

정 신부의 두 번째 초대에 응하심으로써 영성적 삶을 향한 행복한 기다림을 시작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허전하다. 하루하루의 삶이 의미 없는것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가슴 철렁철렁 내려앉는 삶의 위기는 왜 그렇게 자주 찾아오는지….

큰 어려움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은 삶의 무의미함에 힘들어하고, 지금 큰 위기를 겪고 있는 이들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 힘들어 한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을까.

창세기의 계시대로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다.(창세 1,26 참조) 하느님이 창조주인 것처럼, 우리도 창조주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창조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섭리해 놓으셨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들은 목욕을 1년 동안 하지 않은 노숙자다. 육체에선 비누향이 날지 모르지만, 마음에는 찌든 때가 덕지덕지하다. 육체의 때는 매일 씻어내면서도 정작 마음의 때는 닦아내지 않고 있다. 방법을 몰라서다.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Ⅱ’는 그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약 2년 전 가톨릭신문에 연재했던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Ⅰ’이 이론적인 모색이었다면 이번에는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행복한 가톨릭 영성을 구현할 수 있는지 구체적 방법을 탐색하고자 한다. 많은 이들이 ‘영성’을 어렵게 생각하는데, 사실 영성은 단순하다.

삶의 모든 것이 영성과 관련되어 있다. 설거지 하는 것도, 테니스 치는 것도,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도,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모두 영성과 관련되어 있다.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 고통도, 우울한 감정도,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기쁨도 모두 영성적 차원으로 승화할 수 있다. 심지어 숨 쉬는 것 하나도 영성과 연관되어 있다.

이는 인간 자체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강아지는 영성생활을 할 수 없다. 강아지는 반모임에 나가거나, 레지오 마리애 회합을 할 수 없다. 소나무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고 해서 그 소나무 모임이 성체 조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개미들이 줄줄이 몰려다니는 것은 자연과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것이지 영적인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 어떤 피조물도 인간을 제외하고는 영성생활을 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벽돌을 굽고, 그 벽돌로 성당을 만든다. 저 높으신 영적 존재와 관계를 맺고 상호 교류를 한다. 십자가의 길 기도도 바치고 묵주 기도도 한다.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그 어떤 무엇이 있다.

이는 인간이 육체와 정신, 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영이 없다. 영의 기능은 단순하다. 오늘 아침 일어나면서 “어떻게 하면 내 뜻이 아닌 초월적인 그 분의 뜻에 맞게 살까”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영이 한 일이다. 더 높은 뜻, 궁극적인 목표, 궁극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영이 부추긴 탓이다. 하느님의 계획을 쫓는 힘이 영이다.

그 영의 부추김을 일상에서 구현해내는 것이 영성생활이다. 갓 태어난 아기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힘없는 존재로 볼 일이 아니다. 우리가 영을 가지고 태어난, 영적 존재라는 사실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문제는 이 영을 우리가 잊고 산다는데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육체와 정신에만 의존하고 영은 잊고 산다. 테니스를 칠 때도, 수영을 할 때도 우리는 육체와 정신에만 의존한다. 테니스도, 수영도 영적으로 할 수 있다. 설거지도 영적으로 할 수 있다. 직장에서의 노동도 영적으로 할 수 있다.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말한다. “너는 재능이 있는데 왜 공부를 못하니”“조금만 노력하면 되는데 왜 성적이 이러니”….

정작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충만하게 부여받은 넘치는 영성적 자질을 묵혀두고 있다. 그러면서 “인생은 고통스러워”“삶은 힘들어”한다. 마치 학생이 “학교 다니기 싫어”“학교생활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앙인들은 왜 영성 생활을 어렵게 느낄까. 왜 “영성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할까.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정영식 신부 (효명고등학교 교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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