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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9) 영성이란 무엇인가 (9)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자체가 ‘신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여되는 주부적 영성/특별한 신비 청하기보다 주님 이끄심 따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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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주부적(注賦的) 영성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말 그대로 ‘(저절로) 주어진 영성’이라는 의미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입하는 영성이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상관없이, 저 높은 곳에서 인간에게 부여되는 신비적 영성이 바로 주부적 영성이다. 이는 소위 신비신학의 범주에 속한다.

많은 이들이 신비신학, 탈혼, 관상신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일단 어렵게 생각한다. “성인 성녀들에게나 가능한 특별한 영성이야.”, “하느님을 직접 만나는 것은 나에겐 일어나지 않아.”, “하느님은 특별하고 선택받은 이들에게만 발현하셔”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신비는 멀리 있지 않다. 신비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신비는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우선 인간 자체가 신비다. 아니, 나 자신 자체가 신비다. 잠자는 아기의 얼굴을 보라. 나 자신의 손을 보라. 머리카락의 무수한 숫자를 생각해 보라. 신비 그 자체다. 정자와 난자가 처음 만났을 때는 손, 발 같은 것이 없었다. 발가락, 손가락 하나하나가 모두 신비다. 이 모든 육체의 신비를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고 깨닫는 것이 바로 신비신학의 요체다. 이것을 깨닫고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관상신학이다.

이처럼 인간 자체가 신비 그 자체인데 사람들은 신비를 멀리서 찾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그래서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다. 주어진 선물을 선물로 느끼지 못한다. 구원의 튼튼한 동아줄이 내려져 있는데도, 그 줄을 뱀으로 착각하고 잡지 않으려 한다. 그런 인간이 불쌍해서 하느님은 가끔 하늘에 십자가도 보여주시기도 한다. 치유의 은사도 내려주신다. 나약하고 신비를 볼 줄 모르기에 성모님도 가끔 발현하시는 거다. 인간들이 스스로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인간 눈높이에 맞춰서 신비스러움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이러한 외적 신비에 매몰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보여주시는 것들에만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자신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기를, 예수님과 성모님이 ‘짠’하고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에 주저앉아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는 것은 특별한(special) 것이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시는 것은 특별한 것이다. 어쩌다 한 번씩 나올까말까한 이러한 신비를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신비스런 창조물인 나를 통해 신비 자체이신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신비 자체이신 하느님과 합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비의 탑이다. 관상의 탑이고 영성의 탑이다. 인간은 이 탑을 쌓아 올려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멀리 보지 말자. 밥 먹는 행위 자체도 진정한 관상이 될 수 있다. 인간이 밥을 먹는 행위 자체도 어마어마한 신비다. 입에 들어가는 밥알 하나, 김치 조각 하나 하나가 모두 신비다. 하느님의 섭리로 인해 땅에서 양육되어진 그 곡물들이 신비스런 내 몸으로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이것을 알면 식사 시간 자체가 진정한 하느님과의 합치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신비를 깨닫는 삶을 살지 못하기에 밥이 설익었네 타박하고, 반찬 투정도 부리는 것이다. 아내가 구운 꽁치의 꼬리가 조금 타면 어떤가. 된장 맛이 구수하지 않으면 어떤가. 우리는 혹시 큰 종이에 찍힌 점 하나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넓고 흰 종이를 보지 못하고 점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믿음’과 함께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수동적 신앙’이다. 수동적이라는 말은 나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신앙에선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능동적 신앙이 적극적 의지를 가진 믿음을 의미한다면 수동적 신앙은 주어지는 은총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이 직접 이끄신다. 우리는 인간의 말을 따를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상호 형성의 관계다.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형성시킨다. 그렇게 공동체 안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절대자의 뜻을 구현해 나가도록 창조된 것이 인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협조자다.

하지만 하느님은 협조자가 아니다. 주인이다. 그분이 원하시면 따라야 한다. 그 앞에서 내 뜻 내 의견은 접어야 한다. 이유가 있다.


정영식 신부 (효명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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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1-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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