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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27) 계시에 대해서…(12)

믿음은 하느님 만나는 유일한 통로/ 매일 삶 안에서 주님 뜻 찾아가는 것 중요/ 자신 버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그분 따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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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새 인간의 모델이다. 여기서 새로운 인간은 어떤 의미일까. 간단히 말하면 늘 아버지만 찾는 인간이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했다. 내가 주도권을 갖지 않고 아버지께서 온전히 주도권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진정한 믿음 안에서 가능하다.

믿음? 어렵다. 그분은 감추어져 있다. 지성에 의해 인식될 수 없다. 하느님을 눈으로 본 사람이 있는가? 없다. 오직 믿음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영성적 현존의 중심에서 자리 잡고 있는 믿음은 계시하시는 사랑 깊은 하느님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믿음은 그분의 현존을 매일의 삶 한 가운데서 발견해 내는 작업이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다. 머리로 생각하려 해도 인식되지 않는다. 지성은 유한하고 하느님은 무한하기에 지성의 유한한 그릇으로 무한을 담아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삶의 한가운데서 늘 우리에게 발견된다. 믿음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께 마음을 향하고 눈길을 향하고 지성을 향한다면 전 인격적 차원 안에서 그분을 느낄 수가 있다. 눈으로 그분을 느낄 수 있고, 지성으로 깨달을 수 있다. 어떻게? 새로운 차원으로 가능하다.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나는데, 눈으로 보면 그 안에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신비스런 새싹의 돋아남이, 신비스런 잎새의 색깔이, 신비스런 나무의 성장이 느껴진다.

우리는 하느님을 삶에서의 체험들 속에서, 가정과 성당, 직장에서의 다양한 인간관계 안에서 만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삶이 새로운 차원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자면 매일 매일의 삶의 경험과 체험들 속에서 그분을 느낄 수가 있다.

매일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그 안에 하느님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누구나 다 매일의 삶을 살도록 기회를 주셨다. 그런데 그 삶 속에서 하느님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내 생각으로만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못 느낀다. 하지만 매일 삶 속에 하느님이 함께 섭리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좋든 나쁘든 매일 삶 안에서 그분의 뜻을 찾아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아무리 나쁘고 고통스런 경험이라도 그 안에서도 그분을 더 짙게 느낄 수 있다. 질병을 앓더라도 그 안에서 그분을 깊이 있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느끼는 거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일이 다가와도 못 느낀다. 이런 사람의 눈에는 그분이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적인 영성적 현존의 중심은 나 자신의 어떤 특권적인 차원 속에서 전개되지 않는다. 교황청에 가야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교황님이 되어야만 하느님을 가장 깊이 있게 느끼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특권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삶 자체에 있다.

왜? 모든 인간은 세계 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땅 속에 뿌리를 두고 있듯이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뿌리를 두고 살아간다. 이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모든 인간은 누구나 세상 삶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서열과 지위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고, 하느님 눈에서 볼 때는 모두가 똑같다. 천국에 가면 특권층이 없다. 일류대학도 없다. 특권층 일류대학은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사회를 위해 더 희생하고 더 봉사하라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인간들이 협력해서 살라고 서로 다른 재능만 주셨을 뿐이다. 일류 이류 삼류 사류를 만드시지 않으셨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의 플랜이 아닌 우리들의 플랜으로 살아선 안 된다.

달나라도 하느님이 만든 나라다. 달에 우주기지 하나 세운다 해도 그 세상은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신 세상이다. 오직 하느님이 주도권을 가진다. 우리는 그저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 속에서 혜택만 받고 있는 것뿐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나는 순전히 세상적일 수밖에 없다. 딴 곳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신앙의 승부를 봐야 한다. 영적인 것을 깨닫는 것도 세상 안에서 깨달아야 된다.

우리는 하느님을 깨닫기 위해서 천국과 연옥에 다녀올 수 없다. 우리가 속한 문화, 내 가정, 내 학교, 내 친구들, 내 직장, 내 성당 안에서 깨달아야 한다. 이 세상 다른 것에서 깨달을 수 있다는 환상을 깨야 한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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