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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진 신부의 세상살이 신앙살이] (132) 자유, 그 놀라운 몸짓이여 (2)

세상에는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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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안에서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살고 싶었지만, 막상 현대무용 선생님이 ‘강당 전체를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걸어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순간 제 몸은 경직돼 굳어 버렸던 것입니다.

현대무용 시간이 타인과 비교를 통해 우등과 열등을 구분 짓는 그런 시간도 아닌데, 교본이 있어 교본 그대로를 따라 해야 좋은 점수와 상을 받는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닌데 말입니다. 그냥 춤을 통해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는 시간인데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강당을 걸어보라’는 말에 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져 버렸습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나? 그런데 다른 분들은 뭐, 자연스럽게 걷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뒤로, 옆으로, 강당 끝에서 끝으로, 대각선으로 자유자재로 걷고 있었습니다.

이에 저의 첫 번째 행동은 선생님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고, 다음으로 선생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선생님이 어떤 행동을 하면 그대로 따라하려고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저의 어색한 행동을 보고 선생님은 웃으면서 ‘그냥 마음대로 걸어보라’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럴수록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그냥 어떻게요? 제발 어떻게 하라고 정답을 주세요!’

‘정답’만을 외우는데 익숙한 삶, 정답만이 진실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삶. 그러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자신을 표현하라는 말에 이내 경직돼 버린 저의 모습. 자유롭고 싶어 현대무용을 배우고자 했는데, 이내 곧 현대무용을 통해 또 하나의 정답이라 생각하는 행동유형을 만들고, 그것만을 정답인양 착각하는 저의 생각. 다리는 몇 도를 찢어야 하고, 팔과 손동작은 어떻게 해야 하고, 몸과 얼굴은 어떤 몸짓을 따라해야 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현대무용을 제대로 배우는 것으로 또 다른 잣대로 나를 재단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정답 안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 정답이 삶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정답을 많이 갖고 싶은 마음 이면에는 타인에게 내가 가진 정답을 강요하려는 욕구, 정답을 가지고 타인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싶은 마음의 욕구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살아갈수록 세상은 단지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답을 넘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고, 인간의 가치를 풍요롭게 만들어줄 무엇인가가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문득 자신들만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진정 자유로운 참사랑’을 가르쳐주었던 예수의 삶을 오답으로 취급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사건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창을 열고 혼자 눈을 감고 생각해 봅니다. 정답이라는 무거운 짐을 예수 안에서 내려놓을 그날이 빨리 오기를 말입니다.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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