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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41) 하느님 뜻과의 조화 (5)

나·이웃·세상 만물과 조화 이루자/ 돈·명예·권력만 추구하면 무의미한 인생/ 하느님 존재 발견해 초월적 삶 되살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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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딱 한 번 주어진 소중한 인생을 잘 살 수 있을까. 간단하다.

인생을 구성하는 요소를 보면, ‘나’라는 존재가 있고, 나 이외의 모든 인간들이 있고 그리고 좁은 차원의 주어진 상황이 있고, 그 상황을 감싸고 있는 넓은 차원의 세계가 있는데, 이 네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룰 때 인생을 잘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네 가지가 조화를 이루면서 사는 것이 하느님 뜻과 조화를 이루는 공명(Consonance, 共鳴)이고 형성이다.

우선 ‘나’의 차원에선 하느님과 합치의 관계가 되어야 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이웃을 연민으로 대해야 한다. 그리고 주어진 상황(장소, 사물, 사건)에서 융화를 이뤄야 하고, 세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조화로운 삶, 잘 사는 삶이다. 관상은 바로 이러한 삶을 목표로 한다. 하느님을 몸으로 깊이 체험하는 것도 관상이지만 진정한 관상은 나와 이웃과 상황과 세계의 조화를 성취해 낼 때 완성된다.

그런데 여기서 관상은 자연적 관상이 있고, 초자연적(신비적) 관상이 있다. 자연적 관상은 종교와 관련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관상이다. 형성의 신비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 이미 형성시켜 놓은 그 어떤 것 때문에 관상이 가능하다. 해, 달, 별, 바다, 단풍 등을 보면서 경외로움을 느끼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휴지를 줍는 일 등이 이러한 자연적 관상의 열매에 속한다. 이러한 관상은 천주교 신자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유교 신자, 불교 신자도 이런 관상을 성취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초자연적 관상은 종교적 의미에서만 가능하다. 하느님의 힘을 빌려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이웃을 돌보는 그런 사랑이다. 자연적 관상에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지만, 초자연적 관상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다.

물론 자연적 관상에 입각한 사랑도 대단한 의미가 있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남녀의 결혼이 혼인성사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는 혼인성사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남녀의 자연 혼인과 출산의 그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사실 주위에는 자연적 관상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친구들을 왕따 시키는 아이들은 자연적 관상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자동차 접촉사고가 났을 때 차에서 내리면서부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자연적 관상의 삶에서 거리가 한참 멀다. 자연적 관상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비록 종교적 구원의 행복감은 만끽할 수 없지만 하느님 뜻에 어느 정도 맞는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인이다. 신앙인은 자연적 관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자연적 관상의 결과들이 정신적 차원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신앙인들도 자연적 관상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냥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좀 더 깊은 차원으로 우리의 마음(영)을 밀고 들어갈 줄 알아야 한다. 우리 각자가 부르는 모든 이름들 속에 있는 초월적 의미를 발견해 내야 한다. 세상 만물과 나 그리고 이웃 속에서 초월적 하느님의 존재성을 발견해 내야 한다.

이것이 인생의 진정한 맛이다. 이 맛을 찾지 않거나 혹은 발견하지 못한다면 인생은 무의미해진다. 종교에서 이러한 가치 구현의 참 의미를 가르치지 않고, 기능적인 신앙생활만 가르친다면 그것은 직무유기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명예, 권력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과거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3일간 머물렀던 일이 있었는데, 러시아의 최근 문제점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들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러시아는 과거 미국보다 인공위성을 먼저 쏘아 올렸던 나라다. 문학, 무용, 음악 등 예술 분야도 미국이 감히 넘보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러시아 과학자와 예술인들이 돈을 많이 준다는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은 미국의 과학과 예술이 러시아를 앞서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돈과 명예를 위해 움직인다. 인간의 삶이 이렇게 기능적 차원에 함몰되어서는 곤란하다. 초월적 삶의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

오늘날 가장 무서운 전염병은 ‘사물 집착증’이다. 중병에 걸려 있다. 이 병을 앓으면 후유증이 크다. 인생이 무의미해진다. 이런 무의미함을 몰아내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예수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의 고집을 합리화 하거나, 정당화 하는데 예수님을 이용하기까지 한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이 적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그 초월적 의미를 발견하고 구현해 내는 이들이 적다. 안타깝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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