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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쩌나] 183. 병에게 야단을 쳤다는데…

홍성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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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루카복음을 묵상하다가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이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루카복음 4장 38~39절을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아픈데 장모의 열에게 야단을 쳤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사람을 보고 야단을 친 것이 아니라 병을 보고 야단을 쳤다는 것이 영 이상하고, 이해가 안 갑니다. 혹시 성경 번역을 잘못한 것인가요?
 

 A. 그렇게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현대인 입장에서는 주님께서 하신 행동이 이상해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선 독자들을 위해서 루카복음 해당 구절을 알려 드리지요.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8-39).

 베드로의 장모가 열이 심했다는 것은 화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위라고 하는 사람이 돈 벌 궁리는 하지 않고 젊은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딴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장모로서는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듣기 싫었을 것이고, 베드로 사도가 아주 미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열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더욱이 자기 사위를 부추겨 이상한 길로 끌고 가려는 사람,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라고 지시한 장본인이 자기를 찾아온다니, 심기가 불편하기 이를 데 없어 자리에 몸져누웠을 것입니다.

 베드로 장모의 이런 심사를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딸 가진 부모로서 당연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이런 전후사정을 다 아시면서도 베드로 장모의 불편한 심기를 위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야단을 치셨을까요? 아마도 베드로 장모가 자리에 눕는 행위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상습적이었기에 그러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일이 자기 마음대로 안 풀리면 무엇인가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위성 행위`로 자리에 누워버리는 습관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 사람을 야단치기는 그렇고 엉뚱한 열에게 야단을 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신학자들 중에서는 열을 야단치신 것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사람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어린 시절 상처에 대한 기억이라고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돈이 없어서, 배우지 못해서 지금 이렇게 사는 거야. 부모님이 나를 챙겨주지 않아 내가 이렇게 사는 거야"하는 말들은 어린 시절 상처가 지금의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는 말이지요. 물론 어린 시절의 힘겨움이 지금 내가 사는 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러나 지금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과거로 돌리는 것은 미성숙한 행위입니다.

 왜냐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은 계속해 흘러가고 없어져 가는데, 과거라는 망령에 사로잡혀서 징징거리고 우는 것은 어른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 일이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퍼질러 앉아 울어대는 어린아이나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울어대도 일이 해결될 리가 없는데 떼를 쓰는 것은 사실은 자신의 무기력함과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기만적 행위임과 동시에 세상사가 자기 마음대로 돼야 한다는 `자기애적 성격장애자` 특성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을 아주 힘들게 합니다. 자기 비위를 맞출 때까지 희생양인 양 행동하기에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엉뚱한 사람들을 가해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위로해주거나 이해해주려고 하면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위로를 자기 방어 겸 타인 공격용으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위로해줘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냥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따끔하게 야단을 쳐야 합니다. 소위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합니다. 엄마가 말 안 듣는 아이를 날 잡아 매를 대듯 말입니다. 이런 특별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자칫 자기 기만적 한탄에 빠져 신세타령이나 하고 사는 한심한 인생으로 세상을 마감할 지도 모릅니다. 요즘같이 부모가 과보호한 아이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자식이 자기 인생을 책임지게 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개입하거나 혹은 과보호를 한 경우, 나중에 무책임하고 무능한 어른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 장모의 열에다 대고 야단을 치신 것은 화병의 원인 즉, 베드로 장모의 그릇된 생각을 고쳐주시기 위한 일갈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 가운데 깊은 마음의 상처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위로를 통해 치유를 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상처를 자기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주님처럼 직면하고 따끔한 처방을 해줘야 합니다.

 <한국가톨릭상담심리학회 1급 심리상담가, 그루터기영성심리상담센터 담당>    cafe.daum.net/withdo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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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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