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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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성경특강 지상중계] 전삼용 신부(오산본당 주임·우르바노대학교 성경신학 구약전공)

인간의 참 주인은 ‘자아’가 아닌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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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신부는 “교회를 믿고 교회의 가르침을 배워 익히며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는 ‘소명’을 맡기시면서, 당신 이름을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계시하십니다.

성서위원회에서 나온 「주석성경」의 설명을 보면 ‘‘나는 있는 나다’는 하느님의 실존적, 실천적 현존, 곧 사람들을 위하여 계시는 그분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라고 설명돼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하느님의 이름을 명확히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당신 이름을 밝히시는 대목이 ‘모세가 파견 받는 상황’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 이름을 들었을 때 느낄 감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강의에서 먼저 성경을 어떻게 바라볼지를 짚어보고 하느님께서 관계의 올바른 형성을 위해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인간에 의해 깨진 관계를 살피고 ‘나는 있는 나’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 상징적 해석 방법론

같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왜 각 종파마다 혹은 각 사람마다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올까요. 유다인들은 유다인들 나름대로 개신교인들은 개신교식으로 동방교회는 동방교회의 전통에 따라, 가톨릭은 가톨릭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성경해석은 자신들이 속한 종교의 믿음이나 교리와 일맥상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해석의 변화는 곧 자신들의 믿음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오로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은 우리 눈이 무엇으로 가려져 있다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더라도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성경을 보는 시각이 바뀌게 된 것은 성령을 통한 새로운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지, 어떤 새로운 방법론을 배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성경해석의 오류를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성령을 충만히 주셨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해석은 절대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읽는 이는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먼저 교회를 믿고 교회의 가르침을 배워 익혀야하는 것입니다.

■ 하늘과 땅

‘하늘과 땅’을 창조하심은 바로 관계를 위한 구별과 질서입니다. 하늘은 남편이고 땅은 아내입니다. 새 하늘은 그리스도이고 새 땅은 교회입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혼인을 통한 결합은 성경 맨 처음의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순간부터 계획돼 있었던 것입니다.

교부들은 이 신비를 아주 구체적으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도 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 신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 첫 구절부터 요한묵시록 마지막 구절까지 하늘과 땅, 즉 하느님과 인간,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 이야기로 이뤄져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물질적인 하늘과 땅의 개념으로 읽기 시작한다면 하느님의 계획 전체를 볼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구분과 질서 안에서 인간을 당신과 한 몸이 되는 혼인관계로 구원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삼기를 원치 않고 또 다른 주인을 섬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 자유와 자아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첫 번째로 주셨던 것이 ‘자유’입니다. 자유를 주지 않으면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처럼 소유하려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뜻과 반대되는 성향’이 내 안에 있어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교만)’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지만 자아는 자신이 주인이 돼 하느님과 어긋나는 것을 행하도록 유혹합니다.

자아가 만들어 내는 결과는 성경에 불만족, 의심, 불순종, 거짓, 위선, 미움 등으로 묘사돼있습니다. 이렇게 자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깨고 단절을 경험하게 하는데, 이것이 곧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입니다.

이 ‘자아’를 이기는 방법은 십자가에 못 박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기 위해 당신 뜻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 소명과 정체성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것의 상징적 의미는 세례를 받기 전에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고 ‘죄의 종살이’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죄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가 안락하고 안전한 지금의 삶을 영위할 것인지, 하느님의 뜻을 영위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할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 즉 당신의 정체성을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자신이 자신의 주인인 줄 알았지만, 이제 명확하게 당신이 우리 각자의 ‘나’, 즉 주인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의도적으로 ‘ego eimi’, 즉 ‘I AM’이라는 이름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명시한 대목들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신 새로운 모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를 입고 이 세상에 해방자로 오시어 당신을 주인으로 받아들여 당신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보여준 10가지 재앙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우상들보다 당신이 월등한 하느님이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자아를 주인으로 섬기든 자아가 좋아하는 것들인 돈이나 권력, 명예, 쾌락 등을 주인으로 섬기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힘으로 그것들과 대결해 당신만이 참 주인임을 밝혀주시려는 것입니다.


정리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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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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