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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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마비 장애 딛고 ‘영문학자’로 우뚝 일어선 장영희 마리아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7) 장영희 마리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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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에 대한 벽이 높았던 시절, 아버지와 함께 끊임없이 문을 두드린 결과 서강대 영문학과에 입학한 장영희는 미국 뉴욕주립대 유학 후 모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

첫돌을 앞둔 어느 날, 아기는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기는 눈만 깜빡이며 울지도 못했다. 엄마는 아기를 안아 달랬다.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아, 소아마비!”라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 아기는 두 발을 모두 쓸 수 없는 1급 소아마비가 되었다. 엄마는 아기를 업고 10년 동안 매일 침술원을 다녔다. 그 아기가 장영희(마리아, 張英姬, 1952~2009)이다.

엄마는 딸이 초등 3학년까지 업어서 학교로 데려다 주었다. 등교할 때 눈이나 비가 오면 ‘목숨을 걸고’ 가야 했다. 엄마는 눈이 오면 눈 위에 연탄재를 깔았고, 비가 오면 한 손으로는 딸을 받쳐 업고 다른 손으로는 우산을 들었다. 겨울이면 딸의 다리 혈액 순환이 잘되라고 두툼한 솜이 들어간 바지를 아랫목에 넣어 따뜻하게 데워 입혔다. 세수와 아침 식사 그리고 보조기를 신는 일까지 모두 엄마가 도와주었다. 딸이 등교했어도 엄마는 딸을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두 시간마다 학교에 왔다.


 
아버지 장왕록 교수와 어린 장영희



번번이 거절당해도 굴하지 않은 아버지

아버지는 장애인 딸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남들처럼 똑같은 교육을 받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활학교가 아니라 일반 학교에 보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일반 학교에서는 신체적 장애를 이유로 입학을 거부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지원할 때도 입학시험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찾아다니며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번번이 거절당했다. 아버지가 서울사대 교수였기에 서울사대 부속 중학교 교장의 배려로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체력장은 면제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 학과 시험에서 한 문제도 틀리면 안 되었다.

장영희는 잠자지도 먹지도 않고 공부만 했다. 그 결과, 중학교 입학시험에 ‘기적같이’ 합격했다. 대학들도 장애인에 대해서는 철벽이었다. 아버지는 서강대 영문학과장인 미국인 신부를 찾아갔다. 입학시험 이야기를 했더니 “시험을 머리로 보는 것이지 다리로 보나요?”라며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이렇게 해서 장영희는 서강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 장왕록 교수는 60여 권의 영미문학 번역서를 냈다. 「그리스 로마 신화」, 「대지」,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명작들을 우리나라에 소개했다.

 
학생 시절의 장영희



슬픈 소망을 품고

초등학교 때 장영희네 집은 서울 제기동의 작은 한옥이었다. 그곳은 골목이 많아 아이들이 즐겁게 뛰놀았다. 엄마는 딸이 집에서 책만 읽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골목에 아이들이 모일 시간이면 대문 앞에 방석을 깔고 딸을 앉혔다. 아이들은 술래잡기, 사방치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를 했다. 장영희가 할 수 있는 것은 공기놀이밖에는 없었다. 친구들은 기특하게도 장영희를 배려했다. 심판을 보게 하거나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를 맡으라고 역할을 주었다. 바로 그 골목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났다.

장영희가 집 앞에 혼자 앉아있었다. 그때 엿장수가 가위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엿장수는 목발을 옆에 세워놓고 앉아있는 장영희를 보더니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리어카를 멈추고 장영희에게 다가왔다. 엿장수는 미소를 지으며 깨엿 두 개를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면서 “괜찮아”라고 했다.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장영희는 후에 그 엿장수가 한 말 ‘괜찮아’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 격려해주는 말, 부축해주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영희에게 작은 소망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창경원에 가보는 것이 소망이었다. 학교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창경원으로 소풍을 갔다. 장영희는 다리가 불편해 소풍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들려주는 창경원은 마냥 신비롭기만 했다. 중학교 때는 영화관에 가보는 것이, 고등학교 때는 ‘학원’을 다니는 것이 소망이었다. 그리고 대학 때는 다방에 가보는 것이 소망이었다. 당시 다방들은 2층이나 3층 혹은 지하에 있어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릴 수가 없었다. 그 불편한 다리로는 창경원, 영화관, 학원, 다방도 갈 수 없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픈 소망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장영희네 가족은 서울 가회동에 있는 작은 한옥에 살았다. 옆집에는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소년이 살았다. 그의 집에는 병든 어머니가 있었다. 소년의 꿈은 아나운서였다. 소년이 장영희 집에 놀러 오면 노래자랑이나 원맨쇼를 신나게 했다. 어느 여름날, 장영희는 침을 맞고 엄마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서 중절모를 눌러쓴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가 걸친 옷은 모두 아버지 옷이었다. 도둑은 모녀를 보자 뛰기 시작했다. 다리를 절뚝였다. 옷을 이것저것 잔뜩 껴입어 잘 뛰지도 못했다. 모녀는 필사적으로 쫓아갔다. 결국 도둑을 잡았다. 잡고 보니 옆집에 사는 그 소년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어머니의 병이 심해져 병원에 모셔가려고 도둑질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용서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후에 엄마는 딸에게 “그때 그 소년을 잡지 말걸 그랬지…”라고 했다.



시련이 닥치고 절망에 빠져도

장영희는 뉴욕 주립대에서 유학 생활을 마무리하고 박사학위 논문 심사만 남겨 놓고 있었다. 논문은 각고의 노력 끝에 전동 타자기(당시 컴퓨터는 대중화되어 있지 않았다)로 완성했다.

그때 LA에 사는 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려고 트렁크에 한 권뿐인 논문 최종본을 넣었다. LA에 도착하니 언니는 한국으로 떠나고 없었다. 다시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한 친구가 공항까지 마중 나왔다. 그 친구가 장영희에게 대학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기 집에 잠시 있자고 해서 그곳으로 갔다. 도착해 막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데, 친구 딸이 뛰어들어오더니 도둑이 차 트렁크를 열고 짐을 몽땅 가져갔다고 말했다. 장영희는 벌떡 일어나 “내 논문, 내 논문…” 하다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대학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문을 걸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밥도 먹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 밤낮을 보냈다.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그 무거운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목발을 짚고 눈비를 맞아가며 힘들게 도서관을 다녔던 날들,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밤새워 책을 읽었던 날들이 물거품이 되었다.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다. 정말 죽고 싶었다. 그때 마음속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어렸을 때 그 골목길에서 엿장수 아저씨가 해준 말 ‘괜찮아’가 생각났다. 장영희는 그 말에 힘을 얻었다. 그래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학교 식당으로 갔다. 그곳에서 토할 정도로 음식을 먹었다. 그러고는 논문지도 교수를 찾아갔다. “영희는 뭐든지 극복하는 사람이니 더 좋은 논문을 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그러면서 학교로 오는 기차 속에서 울다가 잃어버린 콘택트렌즈를 사라며 100달러를 손에 쥐여주었다.



논문 훔쳐간 도둑에게 감사를

지도교수의 따듯한 격려에 힘입어 정확히 1년 후에 다시 논문을 썼다. 논문은 허먼 멜빌이 지은 「백경(Moby Dick)」에 대한 것이었다. 장영희는 논문 첫 페이지에 이렇게 헌사를 썼다. ‘내게 생명을 주신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께 이 논문을 바칩니다. 그리고 내 논문 원고를 훔쳐 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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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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