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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19)SNS 폭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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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폭로의 시대라 할 만큼 을과 갑, 여성과 남성, 진보와 보수 간에 폭로와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SNS에 가득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 적도 없고 앞뒤 정황을 이해할 만큼 충분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 때로는 한 쪽의 주장을 담은 정보나 자극적인 사생활에 대한 폭로로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여하튼 우리의 두뇌가 현실을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내가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것에 더 귀를 기울이고 반응하면서 진짜를 외면하기도 한다.

최근 한 유명 작가가 무언가를 폭로하고 나서 사건과 연루된 지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글을 읽었다. 이유는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란다. 확고한 신념도 ‘전화 한 통’에 담긴 목소리만으로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표정도 목소리도 없는 사이버공간에서 더 용감하다. 그래서 온라인 폭로전은 얼굴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들으며 솔직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폭로하는 소통 방법과는 매우 다르다. 보이지 않기에 더 과격해지고 감정의 늪에 빠져 후회할 말을 하기도 한다.

SNS에서의 폭로는 억울한 자들의 유일한 저항 방법이다. 을이 갑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비기득권자가 기득권자에게 맞대응할 수 있는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언젠가 한 지인이 함께 근무했던 부하 직원과 SNS 폭로전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거짓과 과장으로 지인을 조롱하며 엄청난 치욕을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방의 팔로워들까지 합세해 비난하고 비웃어, 일상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힘겨웠다고 한다. 평소 지인의 성격으로 보면 그는 이성적이며 매우 합리적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정당했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지만, 상대방은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라서 허황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온라인에서 서로 주고받은 메시지만 보더라도 그의 주장이 일리가 있어 보였다. 온라인에서 지인은 정중하게 ‘건전한 논쟁’을 제안했다. 그리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면 법정에 갈 수밖에 없다”고도 호소했다. 하지만 돌아온 댓글은 욕설에 가까운 조롱과 비난이었다. 분명 지인의 글만 보자면 이성과 절제된 표현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려는 노력까지 보였다. 하지만 상대방은 지인에게 피해를 봤고 억울한 감정이 너무 컸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상대방의 이성적 표현은 그저 차갑고 매몰차며 공허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자신의 처지에 대한 공감이 없다면 그 이성적 제안은 오히려 협박이며 모욕이 된다.

특히 기득권자들의 잘못을 폭로하고 조롱하는 과정은 보는 이들에게 쾌감을 준다. 팔로워들이 합세한 집단 공격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중독적이기까지 하다. 불행하게도 요즘은 성직자나 수도자들까지 이러한 폭로전에 말려들어 고통받고 있다. 갈수록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기득권자로 바라보는 시선이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개인은 가난하고 또 가난한 이웃을 위한 사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결국 운영책임자로서 힘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단체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누군가 “나는 피해자고 억울하다”며 폭로전에 들어가면 옳고 그름의 잣대는 더는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 단지 억울하다고 느끼는 그 ‘감정’과의 소통만이 필요할 뿐이다. 억울함이 커지면 광기를 동반하고 한계를 모르는 반격이 시작된다. 남는 것은 치열한 법정 싸움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폭로는 짧지만, 상처는 양쪽 모두에게 크게 남고 아주 길게 간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미워하며 힘겹게 살고 싶지 않다. 힘을 가진 자나 억울함을 느끼는 자 모두 ‘마음을 흔드는 소리’를 직접 듣고, 마음을 담은 눈을 바라보면 어느 순간 서로의 소중한 감정을 만나는 지점이 생길 것도 같다. 거기에서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마태 5,25)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성찰하기

1. 즉각적 감정의 분출구인 디지털 매체의 속성을 이해해요.

2. SNS에서 음모와 괴담, 나쁜 폭로에 흥분하고 단죄하기보다 폭로의 원인인 억압적 체제를 읽어요.

3. 억울한 자들의 저항에 담긴 아픈 마음에 공감해요.

4. 우리의 최선은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마태 5,25)을 하는 것이며 동시에 ‘공감’이 최고의 소통이라는 것을 기억해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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