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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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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5 17―37
우리에겐 형식이 너무 많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이는 유교의 영향 때문이 아 닌가 생각된다. 관혼상제의 세세한 규칙들을 다 지키자면 먹고 그것만 연구해도
모자랄 판이다. 사실 제사 때 어떤 음식을 어디에 왜 진설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 러면서도 우리는 그냥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문화라는 이름 아래 적당히 얼버무 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들어와서 불교의 오랜 전통을 밀어내는데는 이성계의 계획된 정치철학이 한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무력으로 전권을 잡은 그는 국민의 정신마저도 철저히 사로잡는 게 소원이었다. 그래야 명실 상부한 대왕의 자리에서 만복을 오래 누릴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불교의 여러 가지 행사들을 금지시키고 대신 유교의 관혼상제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국민들은 관혼상제의 세세한 부분을 숙지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나라에 대한 불평이나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런 방법으로 이성계는 조선시대의 서막을 얄미울 정도로 약삭빠르게 헤쳐나갔다. 이렇게 해서 형식문화는 우리들 가슴속에 깊이 새겨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형식이나 체면을 많이 따지고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형식 배제 근대에 와서 형식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지만 뿌리가 깊기 에 쉽지 않아 보인다. 교회내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있다. 미국의 경우 사제가
수단을 입는다든지 수도자가 수도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러 나 우리는 수단이나 수도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당연시한다. 어떤 분들은 수도 복을 벗으면 수도자로서의 신원이 절단 나는 것처럼 형식을 중요시하고 있다.
사랑만이 살길이다 형식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알맹이가 중요하다. 정신이
중요하다. 근본이 중요하다. 형식을 갖추었으나 그 내용이 빈약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신자도 형식적으로는 세례 받고 견진 받고 레지오 활동을 하고….
이렇게 근사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소망하는 마 음이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인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셨다. 이것이 율법의 근원이 되었다. 율 법의 근본은 사랑이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십계명을 가지고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적용시키기가 어려워 그들 나름대로 613 개의 세칙서를 만들었다. 이를 실생활에 적용시켰으나 이것만 가지고도 모자라 서 탈무드를 만들었다. 이는 책으로 여러 권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민중은 감히
율법의 세칙까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전문가들이나 아는 것 그들의 일이었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가끔 유대인들의 율법 세칙을 위반하셨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아야 함에도 병자를 낫게 하셨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옹호하신 말씀도 그러한 맥락이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 의 이러한 태도에 분개하고 예수님을 율법반대론자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예수 님은 자신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신다.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왔다” 라고 말씀하신다.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 이라고….” 그뿐만이 아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는데 그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
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위해서 난 사람들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율법에 관한한 전문가였다. 그들보다 더 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 씀은 너무 과한 표현이 아니실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형식에 매달려서 전전긍 긍했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나 인간을 사랑하는데 있어 서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앞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든지 안식일에 몇g까지 들 수 있느냐 혹은
몇 걸음을 걸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한다마는 나는 인간을 말로 괴롭히는
것까지도 금한다는 것이다. 율법이 감은하지 말라고 강조하나 나는 마음으로 간 음하는 것도 금한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은 상대방을 이미 괴롭히 는 것이다. 자꾸 쳐다봄으로써 혹은 나쁜 기를 보냄으로써 괴롭힐 수도 있을
것이다. 이혼도 마찬가지인데 당시 여자들은 남성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자를 여러 가지 이유를 달아서 내보냈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서 예수께서는 이혼을 금하신다.
예수님의 생각은 율법이라는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율법 을 위해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도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성 직자도 수도자도 신자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신자들이 성직자나 수도자를 위 해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 아닐까? 【최기산 신부(인천가톨릭대 교수)】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199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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