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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배 속에 갇혀버린 요나처럼 딜레마에 빠진 머튼

[토머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12. 작가와 관상가 사이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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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회 모토 “기도하고 일하라”

가톨릭 수도생활을 자주 접하지 않은 이들은 수도자들을 ‘기도만 하며 사는 이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수도원을 방문한 이들은 깜짝 놀란다. 수도승들이 농장과 학교, 여러 공예실에서,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서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수도승들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모토 아래에서 장상과 공동체로부터 주어진 소임을 하며 살아간다. 물론 때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소임이 주어졌을 때, 이를 순명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다. ‘내가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온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힘든 소임을 불평하기도 하고, 함께 일하는 수도자들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한다. 예전에 자신은 수도원에서 청소하며 단순하게 살기를 바라는데, 장상이 자신에게 힘겨운 소임을 명하자, 수도원을 떠난 경우도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불평이나 힘겨움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릇된 수도생활에 대한 이상이나 영성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 미숙하여서 하느님의 일과 세상의 일 혹은 자기 일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일이며, 작고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겸손하게 사신 나자렛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힘겹고 복잡한 일을 하더라도 그 안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기도와 일, 관상과 활동의 통합된 영성 없이 세속적이거나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볼 때, 수도생활이나 신앙생활의 여정은 불평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불평의 시기도 하나의 과정인 것 같다.

토마스 머튼도 1950년대 초반까지 작가와 관상가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다. 「칠층산」에 대한 엄청난 관심으로 이어진 판매는 그를 매우 혼란스럽게 했다. 세속에서 물러나 있는 이가 어떻게 성공적인 작가가 된다는 것과 부합할 수 있는가? 그의 딜레마는 세속과 수도원이 상반된다는 이원론적인 견해에 뿌리 박혀 있었다. 그는 “나는 수도원 안으로 나와 함께 작가로서의 모든 본능을 가지고 왔다.… 작가라는 이중적인 그림자가 봉쇄 구역 안까지 나를 따라 들어왔다”고 언급하고 있다.



「칠층산」에 대한 엄청난 관심으로 고민

그의 작가와 관상가 사이의 충돌은 더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어쩌면 그 마지막에 그 ‘작가’가 나를 죽일 것이고, 그는 내 피를 마실 것이다…. 나의 성소나의 관상적인 성소에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고 잿더미처럼 보일 날이 올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아마도 순수한 관상이 미적인 직관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겼던 자크 마르틴(Jacques Maritain)과 가리구-라그랑주(Rginald Garrigou-Lagrange)와 같은 토미스트 학자들 작품들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머튼은 세 가지 딜레마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작가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과의 신비적인 관계에 도달하기를 원하고 있는가? ‘기도하고 일하라’는 시토회의 관상 수도생활 안에서 육체 노동의 삶에 글을 쓰는 것이 포함되지 않는 듯한데 자신에게 주어진 이 새로운 소임을 통해 시토회 성소를 단순히 계속해서 고수하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고착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우선 그의 장상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한다. 그러나 순명 서원에 대한 그의 엄격한 해석은 이 딜레마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지속적인 분투는 그의 삶의 목적이 관상가가 되거나 심미적인 직관으로 작가가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에 있고, 관상은 인간의 활동들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 주었다.



봉쇄 구역 안에서 머튼의 세상이 열리다

이러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그는 「요나의 표징(The Sign of Jonas, 1953)」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관상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저의 글 쓰는 소임에 관한 회의는 실로 한심한 일이었습니다”라고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사실 글쓰기는 참된 침묵과 고독, 기도에 접근하도록 그를 도왔다. 머튼은 “글을 쓰는 것은 진정한 침묵과 고독이 나에게 접근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글쓰기가 나에게 기도하는 것을 돕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글쓰기를 잠시 멈췄을 때, 나의 내면의 거울이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고 깊고 고요하다는 것과 하느님의 빛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마치 하느님께서 나에게 가까이 오시는 것처럼 어떤 바람도 없이 즉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봉쇄 구역 안에서 머튼의 세상은 점점 열리기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이 되었을 때, 머튼은 수도원과 세속, 수도승들과 평신도들, 관상과 활동에 관한 이원론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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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9-18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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