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네 가족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이 다 다르다. 남편은 머리를 먼저 감고, 나는 국을 데우기 위해 가스 불을 켠다. 이제 3살 된 서진이는 “치쥬, 치쥬(치즈)” 하며 뒤뚱뒤뚱 냉장고 앞으로 걸어간다. 6살 형은 손에 쥐고 잤던 장난감을 이불 속에서 찾는다. 한집에 사는 가족이라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나는 게 이렇게 다르다.
“나는 육아 휴직할 때 제일 마지막에 씻었는데, 자기는 자기가 씻는 게 제일 중요한가 봐.”
남편의 답이 돌아왔다. “당연하지, 꾸미진 못해도 단정해야지. 지성이한테 폐 끼치진 말아야지.”
누군가 내게 “아침에 머리를 감지 않고, 잠옷 차림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말한다. “유치원 앞까지”라고. 헝클어진 머리에 두꺼운 외투 안에 잠옷을 입고 갔던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러나 남편은 아이들의 아침밥을 덜 먹이더라도 아이와 자신의 ‘용모단정’을 어겨본 적이 없다. 설명인즉슨, 유치원 하원 시간에 구름떼처럼 모인 엄마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빠라는 거다.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네 가족이 한 공간에 머무는 주일 오후, 두 아들이 쏜살같이 미끄럼틀을 오르내린다. 둘이서 잘 놀다가, 장난감을 뺏고 뺏기다 둘째의 울음보가 터졌다. 싸움을 말리다, 내 목소리 톤은 굵고 낮아졌다. 엄마의 변명, ‘절대 화는 내지 않았다. 다만 웃지 않았을 뿐.’
그런데 첫째가 운다. “예쁘게 말해야지. 왜 화를 내? 엄마 때문에 힘들어서 같이 못 살겠어. 오늘 두 번이나 화내고! 그럼 나 엄마 배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응?”
“배 속으로 다시 들어온다고? 내가 원하는 건데?” 우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눈물이 그치질 않는다.
지성이가 울면서 말한다. “얼굴 쓰다듬어줘. 웃으면서 ‘더 많이 사랑해줄게’ 하고 말해줘. 더 예쁘게 웃어.”
그 어떤 영화감독도 이보다 더하진 않으리. 온갖 열연 끝에 아이 마음은 눈 녹듯 편안해졌다. 내 평생 ‘사랑 표현하기’를 이렇게 연습시키는 감독은 없으리.
지성이에게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엄마는 회사에서 지성이 보고 싶을 때, 이렇게 지성이 사진을 봐. 지성이는 유치원에 있을 때 엄마 생각해?” “응, 근데 즐거울 땐 엄마 생각이 안 나.”
김남조 시인은 노래했다.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하고. 서로 다른 네 사람이 머무는 주일 오후의 풍경이 눈부시다. 다른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장난감들 사이로, 오후의 볕이 드나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