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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사제’였다”… 인문학자가 추론한 청년 다산의 삶

정민의 다산독본 : 파란(波瀾) / 정민 지음 / 천년의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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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교수가 다산 정약용의 인간적 결점과 그늘까지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다산 평전 「정민의 다산독본 : 파란(波瀾)」을 펴냈다.



“천주교의 시선으로 본 다산은 내가 알던 다산이 아니었어요. 완전히 낯설었어요. 다산 하면 애민정신을 떠올리지만, 젊었을 때 정치가로서의 다산은 권모술수도 있고, 배짱과 순발력도 있어요. 우리가 알던 근엄한 학자풍과는 달리 정치가로서 동물적 감각을 갖춘 느낌이에요.”

마흔 권이 넘는 책을 쓴 인문학자 정민(베르나르도,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한양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다산 관련 책만 아홉 권을 출간했다. 18세기 지성사를 공부하다 다산 정약용(요한 사도, 1762~1836)을 만났다. 2006년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시작으로, 「다산 증언첩」 「다산의 재발견」 「삶을 바꾼 만남」 등 다산 관련 책을 줄줄이 썼다. 최근 학술 영역에서 다룰 수 없었던 다산의 젊은 날을 파헤친 「정민의 다산독본 : 파란(波瀾)」(천년의 상상)을 두 권으로 펴냈다.

정 교수는 다산과 천주교의 관계에 집중했다. “천주교 측에서는 다산이 한때 배교했지만 만년에 회개해 신자로 죽었다고 하고, 국학에서는 다산이 신자였다가 배교한 뒤 유학자로 돌아왔다고 하죠. 국학계 연구자들은 다산을 천주교로 몰고 가는 것을 질색하거든요.”

그는 “천주교를 뺀 다산은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천주교가 다산의 삶에 얼마나 큰 변곡점이 됐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봐야죠. 진실은 중간에 있는데 ‘전부’냐 ‘전무’냐로 싸우면 답이 없고, 다산의 정체성만 흔들립니다.”

조선 천주교회의 설립과 확산, 박해의 칼날 그 한복판에 다산이 있었다. 조선 천주교회의 창립 주역인 이벽은 큰형수의 동생이었고,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누나의 남편이었다. 천주교는 18세기 후반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져갔다.

“유학이 답보적인 상태에서 동어반복을 하고 있었고, 사회는 시스템을 잃었어요. 권력은 상위 3가 독점하고 나머지는 수탈당하는 상황에서 천주교가 자극을 준 거죠. ‘양반도 없고, 상놈도 없고, 남자, 여자도 없고, 서로 사랑하는 세상이 있는데 어때?’ 하면서요. 복음이 멋지잖아요. 블랙홀에 빨려들듯 들불처럼 번진 거예요.”

정 교수는 살아 있는 청년 다산을 그리기 위해 알려지지 않은 사료를 발굴하고, 삶의 궤적을 촘촘히 추적했다. 다산의 유적지를 찾아다니고, 연구자들을 만났다. “다산은 혜화동성당의 신부였어요. 다산이 ‘천주교 신부’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게 더 이상하죠. ‘어떤 기록에도 신부 명단에 다산은 없다’면서 이건 추론이 아니냐고 하죠. 추론이죠. 하지만 택도 없는 소설은 아닙니다.”

정 교수는 사제가 없었던 초기 조선 교회 당시, 신자들끼리 임의로 신부를 임명했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언급했다. 조선 교회 첫 영세자인 이승훈은 북경 천주당에서 본대로 미사 전례와 견진성사를 집전한다. 1786년 가을, 교세가 확장되자 각 지역에서 미사를 집전할 10명의 신부를 가톨릭교회의 공인 없이 이승훈이 직접 임명한 것이다. 이때 가성직제도에서 ‘가’(假)는 ‘가짜’가 아닌 ‘임시’라는 뜻이다. “가성직제도를 2~3년 운영하다가 중국에서 교리서를 구해왔는데 ‘우리는 신품성사(지금은 ‘성품성사’라고 함)도 안 받았잖아, 이렇게 할 수 없는 거 아닌가?’ 하며 이의를 제기한 거예요. 1789년 윤유일이 북경에 36가지 질문을 갖고 가서 유권해석을 받아옵니다. 조선 신자들은 임시 성직제도를 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고, 북경 교회에서는 조선 천주교회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됩니다. 5년 후 주문모 신부가 들어오죠.”

이승훈이 임명한 10명의 신부 중 5명(권일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은 프랑스 선교사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다. 별도의 기록에 나오는 2명(홍낙민, 최 야고보)을 빼면 3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정 교수는 “3명 중 두 사람은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이라고 말했다. 다산 형제의 이름이 기록에서 빠진 이유는 다산이 배교하면서 문집 등에서 천주교 관련 문제를 스스로 검열했기 때문이다. 달레는 애초에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서 이 기록을 가져왔다. 다산은 이 부분을 기술하면서 ‘그 밖의 여러 사람’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정 교수는 1787년 이승훈과 정약용이 성균관 유생들과 천주교 서적을 놓고 강습하다가 발각(정미반회사건)된 장소가 명륜동 어귀 성균관이 있던 반동이었던 것으로 보아, 다산은 혜화동성당의 신부였다고 설명했다.

청년 시절의 다산을 세상에 내보낸 그는 앞으로 다산의 강진 유배기와 해배(解配) 후 시기의 인간 다산을 계속 따라갈 계획이다. 다산의 위대성만 부각하기보다 인간의 모순적인 내면과 고통, 고뇌를 그릴 예정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박제화된 성인 다산을 만들 생각이 없다. 그도 우리와 같이 숨 쉬고 고통받고 고민하던 청춘이었다.”

이지혜 기자 bonaism@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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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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