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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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릴 때 가장 행복했던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44) 천경자 데레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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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에서. 「출처=미완의 환상여행」

맺힌 한 풀듯 쓰다
수필집·기행문 등 12권 출간
글 진솔하고 개성 강해
책 나왔다하면 베스트셀러

자식 같은 그림 흩어지지 않게
서울시립미술관 93점 기증
영원히 시민 품으로

시인들과 깊은 친분
집에 쌀 떨어지면 
김현승이 가져다주고
좌절감에 빠졌을 땐
서정주 시집 보내주고 위로

하느님을 부르다
어머니 장례미사에 감동
신자 되기로 마음 먹어
시인 홍윤숙 입교 도와



천경자(데레사, 千鏡子, 1924~2015)는 그림 못지않게 글을 많이 썼다. 12권의 수필집과 기행문 그리고 화집을 냈다. 수필집으로 「여인소묘」, 「유성이 가는 길」, 「캔 맥주 한잔의 유희」,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탱고가 흐르는 황혼」 등이 있다. 자서전으로는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가 있고, 기행문으로는 「천경자 남태평양을 가다」, 「아프리카 기행화문집」이 있다. 천경자가 지은 책은 출판되면 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글이 워낙 진솔하고 개성이 강해서 독자들이 좋아했다. 그래서 천경자 개인전에는 책을 들고 사인받으려는 사람들로 넘쳤다. 천경자는 글 쓰는 일은 ‘푸닥거리와 같은 것’이라 했다. ‘맺힌 한을 풀어 버리고 싶어’ 글을 쓴다고 했다.

천경자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원했다. 그래서 93점의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시민들과 후학들이 자신의 작품을 쉽게 만나 볼 수 있도록 기증한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에는 ‘영원한 나르시스트, 천경자’라는 주제로 천경자의 작품이 상설로 전시되고 있다.
 
책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표지


황후의 기품 서려 있는 자화상

작품 중에 나의 시선을 강하게 끈 것은 ‘페루 이키토스’였다. 천경자는 아마존 열대우림을 여행하기 위해 페루 이키토스로 향했다. 그곳에 밤 12시 넘어 도착했다. 아르미스 광장의 성 요한 성당을 보았다. 밤에 본 성당은 환상적이었다. 밤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의 채도를 낮췄다. 성당은 빨간 지붕과 노란 벽면이 대비를 이루었다. 달빛 주변으로 검은 새들이 날아간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온 작품은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였다. 이 그림은 천경자의 대표적인 자화상이다. 여인은 뱀을 화관처럼 머리에 쓰고, 붉은 장미 한 송이와 함께 우수에 찬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눈동자를 노란색으로 표현했고 푸른색으로 눈자위를 칠했다. 그래서 분위기가 신비롭다. 야윈 얼굴, 긴 목, 꼭 다문 입에 황후의 기품이 서려 있다.

천경자는 시인 김현승의 ‘플라타너스’를 좋아했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천경자는 김현승을 페루에 사는 야마나 알파카처럼 ‘순수한 휴머니스트’라고 했다. 천경자의 집에 쌀이 떨어졌다. 어느 날 저녁에 한 중학생이 쌀자루를 매고 찾아왔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갖다 드리래요” 했다. 김현승은 아들에게 쌀자루를 매게 하고 뒤따라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에도 김현승은 천경자가 어렵게 사니까 천경자에게 선물 받았던 수국(水菊) 그림을 돌려주면서 팔아 쓰라고 했다.

천경자는 시인 서정주와도 친분이 깊었다. 어느 잡지사에서 주관한 세계 여행 대담 자리에서 서정주를 만났다. 천경자가 말했다. “브라질 가서 돈 많이 벌어 찍고, 바르고 온 오빠 같네요.” 이러한 인사말을 건넬 정도로 가까웠다. 어느 해 겨울에 우편으로 서정주가 보낸 시집이 왔다. 천경자는 인왕산 기슭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몸도 만삭이었고, 국전에 출품한 작품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었다. 시집을 펼쳐보았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 시가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던 천경자를 구해주었다.
 
천경자의 웃는 모습. 「출처=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새벽 5시~오후 2시까지 작업실서 그림 그려

천경자의 작업실은 2층으로 마당이 내려다보였다. 방에는 대표작들이 걸려 있다. ‘생태’, ‘이탈리아 기행’,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등. 새벽 5시쯤 눈을 뜨면 곧장 방으로 와서 오후 2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이후에도 그곳에서 책을 읽고 쉬기도 했다. 그 방에 있는 시간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다. 아래층에 밥 먹으러 내려가는 것이 귀찮을 때는 도시락을 싸서 올려달라고 했다. 그림을 그릴 때는 늘 모델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가족 중에 누군가가 모델이 되었다. 그림은 바닥에 엎드려 그렸다. 평생 그런 자세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무릎이 아파 물파스를 발랐다. 저녁에는 영화를 즐겼다.

천경자는 그림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년이고 다시 그렸다. 또한 완성된 작품이더라도 액자를 떼어 다시 그렸다. 그림 그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그래서 작품을 서둘러 완성하기보다는 즐기며 천천히 그렸다. 천경자는 자신이 아끼는 작품은 팔지 않았다. 어쩌다 아끼던 작품을 팔면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곤 다음 날 그 그림을 다시 찾아왔다. 이처럼 작품을 자식처럼 아꼈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그림을 보고 “집 잘 보았냐?”하고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

천경자의 어머니는 ‘요안나’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던 어머니의 모습을 ‘장미꽃 조화가 달린 면사포를 두른 어머니의 표정은 참 아름다웠다’고 기억했다. 아버지도 ‘베드로’로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부모가 모두 천주교 신자인데도 천경자는 종교를 갖지 않았다. 이유는 신앙을 갖게 되면 마음을 종교에 빼앗기게 되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림 그리는 작업을 신앙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던 천경자는 자신에게 산기(産氣)가 왔을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사랑을 체념하지 못할 때 하느님을 불렀다. 천경자는 ‘하느님을 잘 모르지만 우주에는 신이 있다’고 믿었다. 눈부신 햇살과 소슬바람 속에서 ‘신의 웃음’을 보았고,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과 일에 미쳐 뜨거운 감격에 젖을 때 ‘신의 숨결’을 느꼈고, 정직과 근면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신의 힘’을 보았고, 운명과 맞서 싸워 이겼을 때는 ‘신의 승리’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집으로 성당 신자들이 찾아오곤 했다. 어머니는 거동이 불편했다. 신부가 집으로 와서 병자 영성체를 거행해 주기도 했다. 결국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천경자는 그때 성당 신자들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연도를 바쳐준 것과 성당에서 신부와 신자들이 장엄하게 장례 미사를 봉헌해 준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세례를 받으려면 교리 공부를 해야 했다. 집 근처에는 후에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장을 지낸 시인 홍윤숙(데레사)이 살고 있었다. 홍윤숙이 입교를 도와주었다. 그래서 천경자는 서울 분도 피정의 집에서 김영근 신부의 주례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데레사’였고, 대모는 홍윤숙이었다.
조병화 시인(왼쪽)과 함께 명동에서. 출처=「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미인도 진위 논란에 충격…절필 선언

천경자의 ‘미인도’를 놓고 ‘진짜냐 가짜냐’의 논쟁이 심하게 붙었다. 그것이 바로 ‘미인도 사건’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미인도’를 천경자는 자신이 그린 작품이 아니라고 했고, 반대로 미술관 측은 진품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싸움에 전문가들이 개입해 ‘진품’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사건은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커다란 관심거리였다. 천경자는 이 사건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과 함께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 이 때문에 절필을 선언했다. 식사도 할 수 없었고, 담배만 계속 피워 정신과 육체가 모두 피폐해졌다.

천경자는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딸이 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도 건강은 좋지 않았다. 잠시 귀국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천경자는 뇌내출혈로 쓰러졌다. 다행히 의식을 되찾았다. 그러나 건강은 급속히 나빠졌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었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는 끝내 미국에서 그 삶을 마무리했다. 뉴욕에 있는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봉헌했다. 유골은 천경자가 즐겨 산책하던 뉴욕 허드슨강에 뿌려졌다.

참고자료 : ▲천경자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랜덤하우스. 2006 ▲천경자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자유문학사. 1984 ▲천경자 「탱고가 흐르는 황혼」 세종문고. 1995 ▲유인숙 「미완의 환상여행」 이봄. 2019 ▲정중헌 「정과 한의 화가 천경자」 스타북스. 2021 ▲최광진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미술문화. 2016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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