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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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책임 위에 자기완성 향해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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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문학관 1층 전시실 내부.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마련된 이곳에서 시인의 문학세계를 만날 수 있다. 오늘의 한국 문학과 가톨릭시즘 -
교회와 사회 잇고 방향 제시하는 가톨릭 지성지 필요 구상시인 분단의 비극을 죽음 초월한 사랑으로 승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문학은 무엇인가. 가톨릭 신자 문인들은 가톨릭 문학과 문인들의 소명에 대해서 깊은 고민과 성찰을 이어왔다.
제8회 한국 가톨릭문학상 시상식을 빌어 문학평론가 구중서(베네딕토)씨는 한국 가톨릭문학사를 일별하고 오늘날 한국 문학과 가톨리시즘에 대해 살펴보았다. 다음은 그 요지이다. 오늘날 한국 문학계의 상황은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 비해 풍요한 편이다. 동시에 문제들도 있고 성찰되어야 할 과제도 있다. 이러한 속에 한국가톨릭문학인회가 있으며 가톨릭문학상도 있다. 한국 문학의 작품 체질에 의거해 말하자면 현대문학사의 본격적인 출발은 1930년대에 이루어졌다. 시와 소설에서의 주지주의와 모더니즘이 그것이었다.
30년대 문학의 대표적 시인은 정지용이고 대표적 소설가는 이태준이었다. 이들이 모여 1933년에 결성한 「9인회」가 문학 활동의 중심적 진용이었다. 이들 중에서 정지용이 가톨릭 신자 시인이었다. 정지용은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에 유학하던 1928년에 그곳의 가와라마치 성당에서 프란치스코를 세례명으로 하여 영세했다. 정지용은 대학 졸업 이듬해인 1930년에 귀국해 서울 명동(종현)성당의 총무가 됐다. 1933년 6월에는 조선 천주교 5교구(경성·대구·원산·평양·만주 연길) 연합 출판위원회가 월간잡지로 「가톨릭청년」을 창간했는데 정지용이 편집장이 되었다. 가톨릭 신자 시인 정지용 이 잡지는 일제하 현실에서는 독보적으로 아트지에 원색 인쇄를 하면서 호화판으로 간행되었다. 김대건 신부 정다산 간도 천주교 40주년 등의 특집도 꾸렸지만 이색적인 점은 개방적으로 문예란을 문단에 할애한 것이다. 주요 필진은 시에 정지용·김기림·유치환·신석정·이상·이효상 소설에 이태준·박태원·서항석 등이 있었다. 이만한 진용으로써 30년대 조선 문단의 주지주의와 모더니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30년대 모더니즘은 같은 연대에 서양에서도 일어난 것으로써 세계의 모든 문제를 지성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파시즘 세력이 대두하자 모더니즘은 좌절을 겪게 된다. 조선에서도 일본 군국주의의 강화 앞에서 마찬가지로 좌절을 겪는다. 그러므로 1939년에 이르러 김기론이 모더니즘의 반성론을 썼다. 『모더니즘이 언어를 세련되게 한 공로는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감각적 말초화에 떨어진 셈이다. 이제 다시 문학 안에서 역사성과 사회성을 회복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시대를 함께 한 지성지의 상실 「가톨릭청년」지 자체로서는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에 입각해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운영하는 지면이 한 시대 한 사회의 형세에 동반하는 경험을 했던 것은 대단히 진취적인 쾌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뒤 「가톨릭청년」은 1936년에 발행이 중단되었고 해방후 1947년에 통권 44호로 복간되었다. 1971년에는 「창조」로 개제해 서울대교구가 간행하다가 1972년에 유신헌법의 언론통제에 의해 다시 중단돼 아직 복간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은 가톨릭교회 출판사의 한 손실로서 성찰되어야 할 과제이다. 교회와 사회 사이의 한 교량이 되고 일반 사회와 더불어 시대적 진로를 제시하는 지성지를 교회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지용 시인은 「가톨릭청년」지를 편집하는 일 외에 1935년에는 「정지용시집」을 간행했고 1939년부터는 문예지 「문장」의 신인 추천란을 통해 이른바 「청록파」의 세 시인 조지훈·박두진·박목월을 문단에 배출하였다. 이 청록파는 해방 후 한국 문단에서 전통 정서와 기개 높은 시혼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구상과 한무숙 해방 후 가톨릭 문인 계열로는 구상의 시와 한무숙의 소설이 앞장서 대두하였다. 시인 구상은 민족의 해방과 함께 온 분단의 비극을 역사의식을 통해 수렴하였다. 피차의 적대적 원한이라 하더라도 「죽음」이라는 초월의 차원에서 다시 사랑하며 생각할 수 있는 은혜로 여겼다. 이것이 구상의 시 「적군 묘지 앞에서」(초토의 시) 목 놓아 우는 장면이다. 시 「월남 기행」에서 『인류가 아직도 깜깜하다』고 한 사연이다. 그러면서 「홀로와 더불어」에는 개인으로서의 실존과 보편적 가치속의 연대가 있다. 「오늘」에는 『시방 살고 있는 영원』이 있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구상 「오늘」에서) 구상의 시가 되도록 비유와 현란한 수식을 피한다고 하지만 쉽고 정직한 말로써도 오늘이란 시간이 강물에 어울리듯 자연스럽게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의 형상적 창조이며 모든 이가 함께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보편가치 신뢰 동양 전통문화 조화 한무숙의 소설 「어둠에 갇힌 불꽃」은 한 맹인 소녀의 비상한 발언을 들려준다. 보이지는 않지만 옆에서 서로 흙탕물을 퍼 끼얹듯 욕설로 싸우는 어느 남정네들에 관해 고아원 선생에게 묻는다. 『선생님 저 싸우는 이들은 앞을 보는 이인가요?』 『앞을 보는 이들이지』 『앞을 볼 수 있는 이에게도 불만이 있나요?』 소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실재에 대한 인식 자체가 은총임을 일깨우는 말이다. 한무숙의 장편 「만남」은 정다산과 그의 조카 하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 순교의 환란 속에 펼쳐지는 고난과 배반과 용서가 서로 만나고 감당하는 의미의 영성적 차원이다. 「사도신경」에서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신자들이 기도를 한다. 이것은 호교적 교조주의의 관념이 아니다. 한 마디로 보편적이고 영원한 가치에 대한 신뢰이다. 이 신뢰는 원래 동양의 전통문화에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후기 유교의 철학인 주자학에서도 그리스도 신앙에 소통될 가능성을 보고자하는 학계의 한 연구도 있다. 비록 「선택적 은총」을 아는 계시 신앙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우주 창조의 주재적 원동력을 느껴 「태극」이라 부르고 있다. 주자가 말하였다. 『그가 주인이고 나는 나그네다』(「주자어류」) 그는 주재자이고 인생은 나그네라는 뜻이다. 조선조 실학의 집대성자인 정다산도 스스로 작성한 자신의 묘지명에서 말하였다. 『태극을 섬기는 것은 헛되고 상제(하느님)를 섬기는 데서 유교의 궁극인 인(仁)도 이루어진다』 가톨릭 문학인의 소명 한국 문학 안에서 30년대 모더니즘은 언어의 말초화라는 차질과 한계를 경혐하였다. 20세기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문명적 대안이 못되는 「해체」의 철학에서 허무주의에 부딪히고 있다. 푸코.데리다.월러스틴에게서 종합과 창조의 원리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한국 문학 안에서 활약하는 다수의 가톨릭 신자 문학인이 있다. 자유와 책임에 바탕을 두고 인간의 자기완성 세계의 자기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현대의 가톨릭문학은 부름을 받고 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05-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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